《‘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문화연대)’는 사회변혁의 관점에서 문화연구에 관심을 가진 이론가들과 1980, 90년대 현장에서 민중문화예술운동을 주도했던 문화예술인들이 주축이 돼 1999
년 결성됐다. ‘문화연대’의 지식인들은 정치경제학적 사회변혁 이론이 문화 영역의 중요성을 간과했다고 지적하며 ‘문화민주주의’와 ‘문화사회’ 구현을 주창한다. “국민 ‘다수’가 문화적 역량을 충분히 계발하고 향유하고 표현하는 문화민주주의”,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에 착취나 억압, 파괴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문화사회”가 이들이 추구하는 목표다.》
▽문화권력=“‘문화연대’가 잘 나가니까 ‘문화권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의도에서 이런 말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제대로 된 문화사회가 되려면 ‘문화연대’가 문화권력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민 모두가 문화를 제대로 향유하는 문화사회 말입니다.”
‘문화연대’의 김정헌 상임대표는 지난달 28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소연회실에서 열린 ‘2003 문화연대 후원의 밤’ 행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실제로 ‘문화연대’는 출범 이후 4년 만에 한국사회의 문화영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단체가 됐다.
‘문화연대’의 창설을 처음 제안했던 심광현 집행위원(한국예술종합대 영상원장·미학)은 “1998년 스크린쿼터 폐지 반대 운동을 벌이면서 변화된 문화지형에 걸맞은 새로운 문화운동의 필요성을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당시 이미 동성애자, 폭주족, 외국인노동자, 힙합족 등 다양한 하위문화 행태를 보이는 소수자들이 나타났지만 기존의 민족민중주의 문화운동으로는 이들을 포괄할 수 없었다는 것.
심광현, 강내희(집행위원장·중앙대 교수·영문학), 도정일(경희대 교수·영문학), 고길섶(문화평론가), 이동연(성공회대 연구교수·문화비평), 원용진(서강대 교수·신문방송학) 등의 문화이론가들과 김정헌(화가), 정기용(건축가), 임정희씨(미술평론가) 등의 문화예술인들이 창립에 참가했다.
▽‘문화사회’를 꿈꾸며=‘문화연대’ 소속 지식인들의 연구 경향은 ‘변혁이론’에 닿아 있다. 안토니오 그람시, 미셸 푸코, 질 들뢰즈, 루이 알튀세르 등 마르크스주의에 뿌리를 둔 유럽 이론가들의 사상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기본 입장은 ‘정치경제학의 관점만으로는 진정한 사회변혁을 이룰 수 없다’는 것.
이동연 교수는 ‘문화연대’의 실천방식에 대해 “특히 알튀세르나 들뢰즈의 ‘구성주의적 색채’가 짙다”고 설명한다. ‘구성주의’란 개념이나 이론은 현실의 반영이 아니며 개념과 이론을 만듦으로써 그에 해당하는 사건이 만들어지고 실현되도록 할 수 있다는 것. 강내희 교수는 “이미 존재하는 현실을 분석한 뒤 그에 대응하는 것은 한발 늦다. 지식인은 만들어 나가야 할 현실에 대한 개념과 이론을 앞장서 제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화영향평가제도=이런 입장은 영화 ‘거짓말’의 상영 허가 요구(2000년), 지상파 TV의 가요순위 프로그램 폐지 운동(2001년), 도서관 콘텐츠 확충과 책 읽는 사회 만들기 운동(2002년), 서울 광화문 권역 민간 매각저지(2003년) 등 자신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문화사회’ 구현의 큰 틀을 마련하는 활동에서 잘 드러난다. ‘문화연대’가 올 7월부터 문예진흥원의 지원을 받아 진행하고 있는 ‘문화영향 평가 제도를 위한 연구’ 프로젝트가 그 대표적 사례.
‘문화영향 평가제도’란 문화 관련 제반 정책과 사업에 대해 문화적 가치와 영향을 총체적으로 평가하는 일이다. 새 정부 출범 이후 문화관광부에 마련된 문화행정혁신위원회 위원을 맡은 심광현 교수는 이에 대해 “국민 대다수가 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정책과 사업을 유도하고 감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들의 이런 현실참여방식에 대해 일부 문화이론가들은 이의를 제기한다. 조희문 상명여대 교수(영화학)는 “‘문화연대’의 이런 조직적 활동은 비정부기구(NGO)의 기능을 넘어 사회의 심판관 역할까지 하려는 것이라는 점에서 우려할 만하다”고 비판했다.
‘문화연대’는 현재 문화관광부와의 협의를 통해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12월 말 연구가 끝나면 2004년 법안을 마련해 2005년부터 시행되도록 할 계획이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문화연대'를 이끄는 사람들이 지난달 28일 '2003 문화연대 후원의 밤' 행사준비를 위해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 모였다. 앞줄 왼쪽부터 이동연(문화사회연구소 소장·성공회대 연구교수), 정은희(간사), 김형진(간사), 김종필씨(간사), 가운뎃줄 왼쪽부터 원용진(정책위원장·서강대 교수), 강내희(집행위원장·중앙대 교수), 고길섶(월간 '문화연대' 편집장), 유승준(문화사회연구소 상임연구원), 유제홍씨(공간환경위원회 부위원장), 뒷줄 왼쪽부터 전규찬(매체문화위원회 위원장·강원대 교수), 이상헌(공간환경위원회 위원장·건국대 교수), 최준영(간사), 유문수씨(시민자치문화센터 사무국장).
▼'문화연대' 어제와 오늘 ▼
‘문화연대’ 결성의 원점인 계간 ‘문화과학’은 1992년 탄생했다.
91년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책을 기획하던 중 강내희 심광현 두 교수가 의기투합해 잡지 창간에 이르렀던 것. 이들 외에 지난해 타계한 문학평론가 이성욱씨, 박거용(상명대·영문학), 이득재 교수(대구가톨릭대·러시아문학)가 합류해 과학적 문화이론, 언어, 욕망, 육체, 공간 등 문화와 관련된 다양한 주제들을 공부한 뒤 ‘문화과학’에 그 성과를 풀어냈다.
이후 문화평론가 고길섶씨와 홍성태(상지대·사회학), 박성수(해양대·철학), 최형익(한신대·정치학), 원용진, 이동연 교수 등이 추가 합류했다.
이들은 현대 사회의 문화 현상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각자 전공한 영역의 벽을 넘나들며 연구해 왔다. 이동연 교수는 “구성원들은 특정 분야에 한정된 전문가라기보다 문화기획자”라고 평가한다.
7∼8년의 연구가 축적되자 ‘문화사회’라는 핵심 개념이 만들어졌고 계간 ‘문화과학’ 외에 이를 실현할 문화운동조직이 필요하다는 심광현 교수의 제안에 강내희, 고길섶, 이동연씨 등이 적극 동조하면서 ‘문화연대’가 창립됐다. 이들은 활동을 구체화하기 위해 산하에 문화사회연구소, 공간환경위원회, 매체문화위원회, 문화개혁감시센터, 시민자치문화센터 등 10여 개의 기구를 두고 있다.
‘문화사회’란 큰 지향점은 공유하지만 구성원들이 추구하는 실천 방식은 다르다. 강내희, 심광현 교수 등은 마르크스, 알튀세르의 입장에서 “문화사회의 구현을 위해 이데올로기, 국가 정책에 대한 조직적 체계적 비판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이에 비해 고길섶씨와 이득재 교수 등은 푸코, 들뢰즈, 가타리 등에 근거해 “이데올로기나 국가 같은 거대 권력보다는 일상에 스며든 권력에 주목해 각 분야에서 크고 작은 대항문화 활동을 확산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은 입장차에도 불구하고 끈끈한 인연으로 ‘문화연대’에서 함께 활동해오고 있다.
일부 구성원들은 현 정부 출범 이후 정부 정책의 비판에 그치지 않고 직간접적으로 정책의 입안과 시행에 참여하고 있다. 심광현 교수가 문화관광부 내 문화행정혁신위원회 위원이 된 것을 비롯해 강내희 교수가 문화재위원회 위원, 이영욱 교수(집행위원회 부위원장·전주대·미학)가 한국문화관광정책연구원 원장 겸 문화재위원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