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암은 지구의 ‘끓는 속’ 마그마 방(房)에서 분출된다. 그러나 불의 용솟음은 시작에 불과하다. 정말 무서운 것은 암흑의 불이 세상 밖에서 물을 만나고 바람을 만났을 때이다.
특히 화산과 빙설(氷雪)의 만남은 지질학적으로 죽음의 입맞춤으로 불린다.
1985년 11월 13일 오후 3시6분. 남미 콜롬비아의 네바도 델 루이스 화산이 대폭발을 일으킨다. 140년 동안 침묵 속에 갇혀 있던 용암은 한순간에 솟구쳐 올라 만년설을 덮쳤다. 그리고 무서운 속도로 몸집을 불려나간다. 용암에 녹아내린 빙설은 불타는 바위 덩어리와 화산재를 끌어안고 거대한 진흙강인 ‘라하’를 이루었다. 라하는 산기슭을 미끄러지듯 타고 내려와 인구 2만5000명의 아르메로시(市)를 향해 치닫는다.
도시가 가까워지자 라하는 높이가 40m에 이르는 괴물로 화하였다. 시속 50km.
대폭발이 있은 지 2시간이 지나서야 콜롬비아 정부는 과학자들과 긴급회의를 가졌다. 그러나 아무런 경고조치도 내리지 않았다. 이때는 이미 분화구를 떠난 라하가 아르메로 시가지에서 사람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여러 차례 강력한 지진이 발생한 뒤에야 소개령이 내려진다. 오후 10시40분. 아르메로와 인근 마을에서 2만2000명이 희생된 뒤였다. 그것은 ‘대학살’과 다를 게 없었다.
콜롬비아 정부는 한 달 전에 이미 지질학자들로부터 ‘재난예측도’를 제출받았으나 이를 묵살했다. 실제 피해상황과 정확히 일치했던 재난예측에 대해 공무원들은 “지나치게 위험을 과장했다”며 반려한다. 예측도에 따라 주민들을 소개시키자면 너무 많은 비용이 들 것으로 우려했다.
네바도 델 루이스 화산이 폭발하던 그 시각 카리브항공 소속 여객기 한 대가 화산재의 구름을 뚫고 유유히 날아가고 있었다고 외신은 전한다. 화산재는 해발 7890m까지 치솟았고 항공기는 정확히 이 고도에 눈을 맞추었다.
문명과 자연의 야만(野蠻)은 이렇듯 찰나의 간극 속에서 공존하고 있었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