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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방형남칼럼]경수로 살았나 죽었나

입력 | 2003-11-12 18:26:00


냉정한 미국인들은 죽었다고 단정한다. 심장은 뛰지만 뇌 기능은 멈췄다고 하는 미국인들도 많다. 최소한 뇌사(腦死)가 미국인들의 판정이다. 반면 인정 많은 한국인들은 기절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시간이 지나면 깨어날 것이라고 우긴다.

우리가 주축이 돼 북한에 지어주기로 한 경수로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는 지난주 비공식 집행이사회에서 경수로 공사를 1년간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KEDO 이사국인 한국 미국 일본 유럽연합(EU)의 내부절차를 거쳐 공식 발표하는 일만 남았다. 1년 전 북핵 문제가 불거지자 중유공급을 중단한 뒤 경수로 종료를 주장하던 미국으로서는 때늦은 결론이고, 남북관계 등을 고려해 공사를 계속할 것을 원하던 한국에는 아쉬운 결말이다.

▼정부의 북한 협박 감추기 ▼

경수로는 역사(役事)다. 무려 46억달러의 공사비가 투입되는 대규모 사업이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저지하기 위해 여러 나라가 힘을 합쳐 북한에 발전소를 지어준다는 의미 또한 막중하다. 그런 경수로의 생사 판정은 정확해야 한다. 경수로는 살아있는가, 아니면 죽었나. 살아있다면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깨울 왕자가 나타날 가능성은 있는가.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지난주 ‘경수로 건설 중단에 따른 피해 보상이 이뤄지지 않으면 함경남도 금호지구 경수로 건설현장에 투입된 남측의 장비와 자재, 기술문건 등의 반출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북한 외무성 대변인의 발표를 보도했다. 남한 언론이 조선중앙통신을 인용해 급히 소식을 전한 것은 당연지사.

그러나 북한의 발표는 새 소식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보도됐어야 할 구문(舊聞)이었다. 정세현 통일부 장관은 북한측이 10월 20일 반출 불허 입장을 통보해 왔다는 놀라운 사실을 뒤늦게 털어놓았다. 남북이 관련된 중요한 소식을 정부가 보름여 동안 쉬쉬한 것이다. 하긴 정 장관은 북한의 제주 민족평화축전 참가에 대한 대가 제공과 관련해 국회에서 위증까지 한 사람이니 북한의 통보를 감췄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우리 정부가 한사코 경수로의 상태를 긍정적으로 보이게 하려는 의도만 눈치 채면 된다.

경수로 공사는 곧 멈추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오래전에 중단됐다. 미국이 요구하던 종결(termination)이 우리의 입장이 반영돼 일시 중단(suspension)으로 매듭지어졌다고 안도한다면 사실을 정확히 모르는 것이다. 현재 경수로 현장 체류인원은 500명 미만으로 줄었다. 일이 제대로 진행됐다면 2500명 이상이 북적대야 한다.

공정이 10월 말 현재 33.4%라고 하지만 올해 들어서는 크게 진척된 게 없다. 대신 인원과 장비를 꾸준히 줄이고 작업도 늦춰왔다. 일시 중단은 현실을 뒤늦게 인정하는 외교적 선언일 뿐이다. 정부의 설명에 의존해 경수로의 운명을 파악하지 말라. 첫 번째 주의사항이다.

두 번째 주의사항은 허공으로 날아가는 돈을 따져보라는 것이다. 경수로는 ‘돈 먹는 하마’다. 지금까지 13억8000만달러가 들어갔다. 우리는 10억달러(약 1조2000억원)를 썼다. 1년간 중단하면 애초 계획에 없던 돈이 더 든다. 그동안 만든 시설을 유지해야 하고, 제작 중인 설비와 부품을 보관해야 하고, 북한이 장비와 자재 반출을 막으면 그 비용이 또 들고 인건비도 계속 투입해야 하고…. 얼마가 더 들지 아직 견적도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 ▼

영락없이 비싼 입원비를 내며 병원에서 하루하루 생명을 이어가는 식물인간의 모습이다. 그나마 소생할 가능성이 있다면 기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핵문제가 잘 타결되더라도 경수로를 지어줄 수는 없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다. 미국의 생각은 8월 사임한 잭 프리처드 KEDO 집행이사의 후임자를 임명하지 않은 데서도 잘 드러난다.

이쯤에서 경수로 사망 선언을 검토해야 한다. 생즉사(生卽死) 사즉생(死卽生) 아닌가. 경수로 중단에 대한 북한의 책임을 묻기 위해서라도 정부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대로 가면 경수로는 남북관계의 실패를 보여주는 거대한 구조물로 변해 점점 더 우리를 옭아맬 것이다. 경수로(輕水爐)는 가벼울 경(輕)자를 쓰지만 실상은 참으로 무거운 존재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