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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복을 빕니다]이강훈 前광복회장 100세로 타계

입력 | 2003-11-12 19:45:00

1992년 서울 동아일보사를 방문해 광복회 활동을 설명하고 있는 생전의 이강훈 선생[동아일보 자료사진]


12일 서거한 이강훈(李康勳) 선생은 한국 독립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긴 현대사의 산증인이었다.

1903년 6월 13일 강원 김화에서 출생한 이 선생은 3·1운동 때 16세의 어린 나이로 고향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한 뒤 이듬해인 1920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도왔다.

그는 이어 1924년 김좌진(金佐鎭) 장군 휘하의 항일 무장저항단체인 신민부(新民府)에서 7년간 활동하며 국내에 잠입해 동아일보 고하 송진우(古下 宋鎭禹) 사장으로부터 네 차례에 걸쳐 거액의 군자금(약 1만원)을 건네받아 김 장군에게 전달했다.

1933년 중국 상하이에서 아리요시 아키라 주중 일본공사를 살해하려다 일본경찰에 붙잡혀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복역 중인 이 선생.[동아일보 자료사진]

이와 관련해 이원범(李元範) 3·1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은 “고하는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선생이 독립군의 무기 구입과 훈련 등에 사용하도록 제공한 1만원가량의 군자금을 네 번에 걸쳐 보내주었다”고 말했다.

이 이사장은 “당시 1만원은 쌀 40만가마의 가치(현재의 656억원 상당·한국은행 경제통계국 추산)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 선생은 생전에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인촌 선생은 독립운동 자금을 부탁하는 사람이 찾아오면 금고문을 열어둔 채 잠시 자리를 비우곤 했다”며 “이는 자금 제공이 문제가 될 경우 도둑을 맞았다고 둘러대기 위한 것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 선생은 1926년 김좌진 장군의 지시를 받아 백두산 근방의 신창학교 교사로 근무하며 젊은이들에게 조국 광복을 위한 민족정신을 일깨웠고, 1929년에는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이린(海林)에서 북만민립중학기성회를 조직해 동신학교를 운영하며 교육 운동에 열정을 쏟았다.

1930년 김 장군이 암살당한 뒤 이 선생은 북만주를 떠나 상하이로 망명해 활동무대를 옮겼고 만주에서 함께 지내던 동지들이 결성한 ‘남화한인청년연맹’에 참가해 목숨을 내건 거사에 나섰다.

이 선생은 1933년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 주중(駐中) 일본공사가 친일파 중국 정치인들을 매수해 한인들의 독립운동 방해 공작을 꾸민다는 사실을 알고 ‘흑색 공포단’을 조직해 그를 살해하기 위한 계획을 실행에 옮겼으나 실패했다. 이 선생은 동지들과 권총, 수류탄 등으로 무장하고 아리요시 공사를 저격하기 위해 요정 ‘육삼정’에 접근하다 이를 미리 안 일본경찰에 체포됐고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 선생은 일본으로 이송돼 나가사키(長崎)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광복으로 출소했다.

출소 후 이 선생은 일본에 머물면서 재일거류민단을 창단하는 한편 이국 땅에 묻혀있던 윤봉길(尹奉吉) 이봉창(李奉昌) 백정기(白貞基) 의사 등 세 분의 유해를 1946년 5월 국내로 모셔와 효창공원에 안장하고 국민장을 치르는 데 기여했다.

이 선생은 1960년 귀국해 한국사회당 총무위원으로 활동했으나 5·16 군사쿠데타가 난 뒤 소위 혁신세력으로 분류돼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2년간 옥고를 치르고 일본으로 떠났다.

1967년 다시 귀국한 이 선생은 1979년까지 독립운동사편찬위 상임위원, 편찬실장을 역임하면서 구한말 의병항쟁사 등 항일운동사 편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손을 거쳐 정리된 책에는 10권에 이르는 ‘독립운동사’와 20권이 넘는 ‘독립운동사 사료집’ 등이 있다. 개인으로는 엄두도 내기 어려운 ‘독립운동대사전Ⅰ, Ⅱ권’을 1990년에 편찬 간행하기도 했다.

이 선생은 또 독립유공자 공적 심의위원과 ‘백범 김구 선생 시해 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윤봉길 의사 기념사업회’ 회장, 민족화합추진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1988년부터 5년간 광복회 회장(10, 11대)을 지냈고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윤상호기자 ysh100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