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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59년 국산 라디오 첫선

입력 | 2003-11-14 18:30:00


우리나라에 전기가 처음 들어온 것은 구한말인 1887년. 미국 에디슨 전기회사가 건청궁에 첫 전등을 밝혔다. 향원정 연못의 물을 끌어올려 발전기를 돌렸는데 물을 먹고 켜진 불이라 하여 ‘물불’이라고도 하고 묘화(妙火)라고도 불렀다.

이때를 즈음해 물밀듯이 서구문명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쇄국의 빗장을 열고자 내미는 당근은 참으로 요망하고 요사스러웠으나 언제까지 뿌리칠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전화는 1896년 궁내부에 설치한 것이 효시. 고종이 승하하자 순종은 부왕의 능에 전화를 설치하고 아침저녁으로 전화곡(電話哭)을 올렸다고 한다. ‘신기한 소리통’ 라디오는 1866년 아산만에서 통상을 요구하던 프로이센인 오페르트를 통해 처음 전해졌다.

그로부터 93년 뒤. 금성사가 국산 라디오 개발에 나선다.

“럭키가 구리무로 돈 쪼깨 벌더니 씰때 없는 짓을 하는구먼.” 주위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러나 구인회 사장의 대답은 단순 명쾌했다. “한국 사람은 원래 재주가 많아. 우리가 플라스틱을 생산하니까 그 속에 진공관 몇 개만 집어넣으면 소리통이 안 되겠나.”

이렇게 해서 일제 라디오 산요를 모델로 한 ‘A-501’이 탄생한다. ‘국내 전자제품 1호’다. 1959년 마침내 미도파백화점에 국산 라디오 제품이 첫선을 보인다. 그러나 “국산이 제대로 소리나 나겠느냐”며 사람들은 시큰둥했다.

극심한 판매 부진으로 금성사는 문을 닫느냐 마느냐 하는 기로에 놓이게 되는데 정작 구세주는 따로 있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의 정당성을 홍보하기에 혈안이 돼 있던 정부가 대대적인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에 나선 것.

그것은 바로 1930년대 나치의 선전상 괴벨스의 전략이었다. 그는 국가보조금을 주어가며 라디오를 각 가정에 보급했고 ‘정권의 입’으로 삼았다.

금성사의 라디오 역시 군사정부의 판촉(?)에 힘입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회사는 급성장했으니 그것은 또한 본의 아니게 ‘정경유착’의 시발이기도 했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