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말까지 숨 죽이고 살던 한국 내의 일본인 처들은 60년 4·19혁명 뒤에야 비로소 모임을 공식화했다. 사진은 63년 5월경 서울 동작구 흑석동에 처음 마련한 부용회 사무실에서 회원들이 집들이 회식을 하는 모습. -사진제공 부용회
▼日女를 保護…李大統領 諭示▼
李대통령은 임시국무회의 석상에서 과거 일정 시에 한국인과 결혼한 일본여자에 대하여 특별한 보호조치를 취할 것을 유시하였다고 한다.
해방 후 이들 한국인과 혼인한 일본여성들은 일본에 대한 한국민의 악감정과 반민법(反民法) 등의 여파로 혹은 이혼을 당하고 혹은 축출당하고 하였으며 또한 그들의 신분이 한국에 입적(入籍)되어 있는 관계로 일본 정부 측에서도 받아들이지 않고 하여 사실상 그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가두에 방황하는 도리밖에 없었던 것인데 이것이 하나의 인도상(人道上)의 문제라고 하여 李대통령은 특히 한국 거주를 희망하는 자에게는 증명서를 교부하고 특별보호 하여 온정을 베풀도록 유시한 것이라 한다.
▼일본인妻들은 영원한 ‘이방인’인가▼
광복 직후 일본인 처는 ‘소수집단 중의 소수집단’이었다. 차마 부부의 연을 끊지 못해 한국을 ‘제2의 고향’으로 선택했지만 ‘과거 식민국의 여성’을 보는 주위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유무형의 박해가 이어지면서 적잖은 일본인 처들이 거리로 내몰려 노점상, 잡역부, 때로는 ‘밤의 여인’으로 연명해야 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는 이런 상황에서 나왔다. 그러나 그들의 상황이 나아진 흔적은 없다. 재한 일본인 처들의 모임인 ‘부용회(芙蓉會·부용은 후지산의 별칭)’의 구마다 가즈코(態田和子·75) 회장은 “해방 직후엔 ‘벙어리’, 6·25전쟁 이후엔 ‘극빈자’로 살았다”면서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때까지 우리는 보호대상이 아닌 감시의 표적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들의 광복 직후 현황은 명확하지 않다. 1942년 일본에 1284쌍, 조선에 106쌍의 ‘한국인 남성, 일본인 여성’ 부부가 있었다는 일본 외무성 자료와 “1945년 말 국내의 일본인 2만7935명 중 1307명이 잔류를 희망했다”는 기사 정도가 당시 상황을 짐작케 할 뿐이다.
이들의 생활상을 조사한 김응렬 고려대 교수는 “일본 내의 일본인 처들이 광복 뒤 대부분 남편을 따라 한국에 왔고, 혼인신고 없이 동거한 경우도 적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50년대 초 국내의 일본인 처는 2000명 정도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현재 부용회 회원은 500여명. 모두 1세대인 이들은 아직 ‘이방인’ 처지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국적이나 민족이 다르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외국인이 한국에서 차별과 폭력의 대상이 되는 건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리 다르지 않다.” 구마다 회장의 지적이다.
황태훈기자 beetlez@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