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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전엔…]동아일보로 본 11월 다섯째주

입력 | 2003-11-23 18:19:00

나병의 고통뿐 아니라 뜻밖의 사상 논란까지 겪었던 시인 한하운. 그는 시를 통해 자신의 불행을 넘어섰다. 1950년대 말로 추정되는 그의 모습. 사진 아래에 자필 서명도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詩集 中 ‘데모’ 句節만 問題…韓何雲씨 實存人物 判明▼

지난 십九일의 국회 본회의에서까지 말썽을 이르킨 문둥이 시인(詩人) 한何雲 시집 문제는 방금 치안국 당국에서 예의 조사중에 있다고 하는데, 항간에 유포된 바와 같이 한씨를 가공인물로 혹은 동 시집중 ‘데모’라는 시(詩)에 불온한 一구절이 있어 한은 좌익이라는 두 점이 문제의 초점이 되고 있어, 지금까지 치안국 당국 조사에 의하면 자진출두한 한何雲씨는 六·二五 전 한하운 시집을 낸 본인임이 확정시되고 있다 하며 다만 ‘데모’라는 시중에서 말썽을 이르킨 불온한 一구절에 대해서만 한씨는 자기의 시집을 출판한 李相哲(越北)이 승인 없이 고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앞으로의 조사는 이에 집중될 것이라고 한다.

▼나환자 시인 한하운 ‘유령인간’ 둔갑▼

요즘은 중학교 교과서에까지 소개된 ‘문둥이 시인’ 한하운(韓何雲·1919∼1975)이 경찰 조사를 받게 된 것은 1949년 출간돼 1953년 6월 재판이 나온 첫 시집 ‘한하운시초’의 한 구절이 문제됐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한바탕 소극(笑劇)이었지만 당시로선 자못 심각한 문제였다. 1953년 8월 1일 한 주간지가 ‘문둥이 시인 한하운의 정체’라는 기사에서 한씨가 가공인물이거나 월북인사라고 주장하면서 논란이 시작됐고 시집도 판매금지 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이 사건을 취재했던 서울신문의 사회부장 오소백(吳蘇白·82)씨는 “표면상으로는 ‘데모’라는 시 가운데 ‘피빛 기빨이 간다’는 표현이 문제였으나 사건 동기는 엉뚱한 데 있었다”고 회고했다. 당시로선 드물게 책이 잘 팔리자 이를 시기한 몇몇 출판사가 논란을 사주했다는 것.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한씨는 멀쩡히 살아 있는 자신의 존재증명을 하느라 고초를 겪었고 시집에서 문제의 구절은 영원히 삭제됐다. 또 서울신문에 한씨를 두둔하는 뉘앙스의 기사를 썼던 오씨와 문제안(文濟安·83)씨는 파면됐다. 국회에서 ‘정부기관지가 어떻게 그런 기사를 쓸 수 있느냐’는 시비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넉 달에 걸친 논란 끝에 한씨는 실존인물일 뿐 아니라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도 밝혀지긴 했지만 이 사건은 6·25전쟁 이후 우리 지식인사회 전반을 휘저었던 사상논란의 씁쓸한 단면을 보여준다.

한씨는 그 뒤 시집 ‘보리피리’(1955) 등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계속했고 59년 ‘천형(天刑)’도 완치돼 75년 별세할 때까지 나환자들의 구호와 복지사업에 여생을 바쳤다.

서영아기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