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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통신]"해가 져야 잠을 자지"

입력 | 2003-11-23 22:28:00


▼"이거 원, 해가 져야 잠을 자지"

-푼타아레나스에서의 첫날 밤

19일 밤 현지시간 11시20분에 푼타아레나스에 도착했다.

대원들 모두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쳤지만 새벽까지 모두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그것은 푼타아레나스(남위 53도)의 이날 해 뜨는 시각이 새벽 5시30분인데 비해 정작 해 지는 시각은 저녁 9시30분이어서 무려 16시간동안 날이 훤하게 밝기 때문. 실제 몸으로 느끼는 '체감 낮 시간'은 더 길다. 새벽 4시면 하늘이 뿌옇게 밝아오고 밤 10시가 훨씬 넘은 시간에도 날이 훤하다. 밤 10시가 넘으면 도시 전체가 불을 밝히기 시작하는데 '대낮 속의 가로등 불빛' 같은 그 풍경은 아주 묘한 느낌을 준다. 시차는 한국과는 정확히 12시간.

대원들은 이날 모두 새벽에야 눈을 붙였지만 아침 8시가 되자 벌떡 일어나 본격적인 하루를 시작했다. 대원들이 묵은 사보이호텔은 말이 호텔이지 한국 지방도시 여관 수준. 목조건물이라 2층에서 사람이 다니면 삐걱거리는 소리가 그대로 아래층에 전달된다. 아침식사는 토스트, 우유, 커피, 오렌지 주스가 전부. 흔히 유럽이나 미국 호텔에서 제공되는 아메리칸 스타일 또는 컨티넨탈 스타일 조식은 꿈도 못 꾼다. 계란 후라이, 과일, 치즈 같은 것들은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다.

말라비틀어진 빵 조각을 억지로 넘긴 뒤 대원들이 찾아간 곳은 경비행기 등 이번 남극점 원정 전반을 도와주는 영국 대행사 사무실. 호텔에서 8 블록을 걸어서 올라가니 조그만 2층집이 나온다. 이곳 대행사 사무실엔 이미 각국에서 모인 원정대원들로 북적거린다. 남극대륙 여름을 맞아 이 대행사가 담당하는 원정대만 5개나 된다고 한다. 이중 우리 원정대가 이번 시즌 처음이고 영국 원정대도 우리와 일정이 같다. 얼마 뒤에는 일본 원정대도 남극점 원정을 시도할 예정이란다.

영국대행사 사장인 마이크 샤프씨(52)는 박영석 대장이 히말라야 8000m급 14좌와 7대륙 최고봉을 완등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지 몇 번이고 되물어본다. 자신이 지금까지 도와줬던 탐험가들 중에 박대장이 최고의 경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한국탐험대 일이라면 대행사 사장이 아니라 열성 팬 수준에서 일을 처리해줬다. 다른 원정대에겐 행여 볼세라 쉬쉬하던 영국산 밀크티를 우리 원정대만 따로 2층 사무실로 불러 대접했을 정도.

대행사 사무실에서 그동안 맡겨놓았던 썰매 3대를 찾아 돌아온 원정대는 낮 시간 동안 GPS를 설정(위도 경도는 물론 해발고도 등도 세팅)하느라 여기 저기 돌아다녀야했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고 하지만 푼타아레나스는 여전히 영하의 날씨에 이따금 진눈깨비마저 내린다. 거리의 사람들도 한국의 늦겨울 옷차림. 바람이 워낙 강해 체감온도는 훨씬 이보다 내려간다.

이현조 대원과 기자는 이곳 푼타아레나스에 있는 칠레 국립 남극연구소를 방문해 남극에 대한 여러 가지 자료를 수집했다. 칠레는 남극조약과는 상관없이 남극을 자국 영토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 남극에 대해 설명하는 칠레연구원은 '우리 남극(our antartica)'이라는 말을 자주 썼다. 그래서 칠레에 입국할 때 한달 동안은 노비자인데도 남극원정대는 비자를 받아야했다.

칠레에 입국해서 남극으로 나갔다가 다시 칠레로 다시 들어오지만 칠레가 남극을 자국 영토로 생각해 탐험기간 남극에 있었던 기간도 칠레에 있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 60일이 넘는 탐험기간을 합치면 어쩔 수 없이 비자를 받아야만 한다. 하기야 칠레에서 남극으로 갈 때 출입국 신고를 하는 것은 아니니까, 뭐라 따질 수도 없다.

점심엔 모처럼 별식을 즐겼다. 남미 목동들이 양몰이를 하다가 출출하면 즉석에서 모닥불을 피워 양 갈비를 얹어놓고 그대로 구워 먹은 데서 유래했다는 아사도. 소금으로 간만 한 채 그대로 장작불에 구운 뒤 탄 부분을 떼어내고 먹는데 양, 돼지, 소, 닭, 순대, 소시지 등 굽는 재료도 다양하다.

특이한 것은 소고기보다 돼지고기 값이 훨씬 비싸다는 것. 남미지방은 목초지가 많아 소 키우는 게 돼지사육 비용보다 싸게 먹힌다.

▼'가락 시장' '개봉동' 가는 시내버스

-남극 전문가 장순근박사와의 만남

남미 최남단 도시인 푼타아레나스에는 교민이 없다. 칠레 한국대사관에 문의를 해 한 분을 소개받았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대사관에서도 별다른 연락 방법이 없단다. 다른 도시로 이사 간 것 같다는 말밖에는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푼타아레나스 거리에 오가는 자동차들의 상당수가 한국차여서 기분이 좋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적어도 5대 중 한 대꼴로 한국차가 지나다닌다. 원정대 사무실에서 썰매를 옮기기 위해 부른 화물차도 한국산 1톤 트럭. 택시들은 대우 르망, 현대 스텔라, 구형 소나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곳 버스도 한국에서 마을버스로 이용됐던 중고차. 아직도 버스 옆구리에 '가락 시장' '개봉동'이라고 쓰인 안내판이 붙어있고 문에 '자동문'이라고 선명하게 쓰여 있다.

포니1을 시작으로 여러 종류의 중고차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기아 리오나 최신형 한국산 SUV들도 뽐내며 거리를 달리고 있다. 이곳 주민들이 즐겨 찾는 TV 수상기와 에어컨도 거의가 삼성과 LG 제품들. 비록 고국사람은 만나기 힘들어도 한국제품들을 보니 너무 너무 반갑다. 절로 애국심이 생기는 듯 하다.

이러한 가운데 우연히 푼타아레나스 도심 한복판에서 아주 귀한 한국인 한 분을 만났다.

다름 아닌 장순근박사(57). 장순근박사는 한국해양연구소 극지연구센터 책임연구원. 남극에 한국 세종기지(88년 2월 준공)가 세워지기 전인 1985년부터 남극을 드나들며 세종기지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했고 이후 4차례나 세종기지 월동대장을 지닌 남극 지킴이다. 이번에도 생물학자, 얼음 전문학자 등을 이끌고 남극에 왔단다.

장박사 일행은 21일(현지시간) 배편으로 마젤란해협을 건너 28일경 남위 62도13분에 위치한 킹 조지섬의 세종기지에 도착할 예정이란다.

장박사에게 '10수년 동안 계속 남극에서 지내는 게 지겹지 않느냐?'고 묻자 장박사는 "남극은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곳이에요. 한번 지내봐요. 워낙 변화무쌍한 자연현상들이 파노라마처럼 벌어지니까 황홀합니다. 처음 남극에 왔던 사람들은 떠나면서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하지만 다음에 보면 그 분들이 다시 오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합디다"라며 껄껄 웃었다.

이순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장박사의 남극에 대한 정열은 뜨겁기만 하다.

그가 쓴 '야 가자 남극으로'라는 책을 내밀며 사인을 부탁하자 장박사는 거침없이 책에 '남극 만세'라고 써줬다.

전창기자 je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