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중국은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다. 중국의 성장이 오히려 일본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중국 광저우의 혼다 자동차 공장. 동아일보 자료사진
《21일 도쿄 아키하바라 지하철역 인근 대형 서점. 4층 경제·경영 코너에 들어서자 경영혁신과 중국관련 서적들이 중앙 책장을 차지하고 있다. 수북이 쌓여있던 ‘중국 위협론’에 관한 책들은 사라지고 중국 각 지역을 상세하게 소개하거나 중국진출 비결을 다룬 책들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이타미 히로유키(伊丹敬之) 히토쓰바시대 교수는 그 이유를 “20년간의 교류를 통해 중국이 일본에 위협이 되기에는 아직 멀었고 오히려 중국의 경제성장이 일본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매스컴이 떠드는 ‘중국 위협론’은 일본인 특유의 엄살에 불과하다. 이미 기업과 학계의 초점은 중국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에 맞추어져 있다는 것.》
매스컴이 떠드는 ‘중국 위협론’은 일본인 특유의 엄살에 불과하다. 이미 기업과 학계의 초점은 중국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에 맞추어져 있다는 것.
▽중국이 성장할수록 일본은 돈을 번다=중국은 1990년대 후반부터 10만원 이하 DVD플레이어를 내놓으면서 세계 시장의 50%를 차지했다. DVD플레이어는 일본이 최초로 개발한 상품.
일본 언론은 중국의 DVD시장 제패를 중국 위협론의 중요한 근거로 내세웠다. 중국현지공장에서 기술이 유출돼 중국인들이 독자적인 DVD플레이어 공장을 세울 수 있었다는 것. 그러나 중국이 DVD플레이어를 수출하면서 가장 이익을 본 나라는 일본이다. 광픽업(턴테이블의 바늘에 해당) 등 핵심부품은 100% 일본에서 수입하기 때문. 결국 중국이 DVD플레이어를 수출해서 창출한 부가가치의 대부분은 일본 업체로 고스란히 넘어간다.
이런 구조는 일본의 대중(對中)수출 추이를 보면 극명하게 나타난다.
1998년 일본의 대중수출은 219억달러에서 2002년 414억달러로 크게 늘었다. 금년에는 무려 19%가 늘어난 492억달러로 전망된다. 대중 기계수출도 1998년 49억달러에서 2002년 103억달러로 4년 만에 두 배 이상 늘었다.
중국이 성장할수록 일본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일본은 값싼 중국산의 범람에도 너그럽게 대응하고 있다. 중국경제가 성장할수록 일제 부품이나 기계를 찾는 수요가 더욱 늘어나고 중국제품이 물가도 낮추기 때문이다.
중국제보다 싼 스즈키의 ‘초이노리’ 오토바이. 동아일보 자료사진
▽낮은 인건비도 무섭지 않다=첨단제품뿐 아니라 로테크(low tech)산업에서도 중국을 극복하는 움직임이 나타나 일본에 자신감을 불어넣고 있다.
19일 오사카 가도마시 스즈키 매장. 최근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오토바이 ‘초이노리’ 옆에는 ‘달려라 국산(走れ國産)’이란 푯말이 붙어 있다.
종업원에게 인기비결을 묻자 “엔진과 부품이 모두 일제고 일본에서 만들었는데도 경쟁업체의 중국산 오토바이보다 30만원이 더 싸다”고 답했다. 초이노리의 가격은 59만8000원. 25년 전 가격과 같다.
마쓰시타 역시 경쟁업체가 중국에서 생산한 냉장고(24만원)와 가격이 비슷하면서도 전기소모량과 소음이 절반밖에 되지 않는 120L 소형냉장고를 29만원에 내놓아 인기를 끌고 있다.
중국 근로자의 월급은 약 15만원으로 일본(170만원)에 비해 10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어떻게 중국제보다 싼 일제를 만들 수 있을까.
20일 도쿄 국제전시장에서 열린 ‘국제 산업자동화기계 전시회’를 보자 의문이 풀렸다. 이날 관람객의 시선은 미쓰비시전기가 출품한 산업용 로봇에 모아졌다. 유치원생만 한 키에 팔이 달린 로봇은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쏟아지는 부품들을 ‘콕’ 집어 정해진 장소로 빠른 속도로 옮겨놓고 있었다. 자동 식별기의 가격은 4000만원.
이 회사 아다치 다카시(安達隆司) 영업과장은 “베어링 생산 부품업체뿐 아니라 레토르트 등을 만드는 식품업체에서도 자동식별기를 사용할 수 있다”며 “사람은 30분만 반복작업 해도 집중력이 떨어지는 반면 기계는 24시간 돌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100여명이 해야 할 일을 기계 1대가 한다는 것.
이날 전시회는 화낙, 가와사키, 미쓰비시, 야마하, 도시바 등 일본제품 일색이었다. 전 세계 자동화 산업기계 시장의 95%를 장악한 일본 업체들이 제조업체의 든든한 후원자인 셈.
▽제조업의 서비스화=일본의 중소기업이 한국 업체보다 기술력은 높지만 값싼 중국산 때문에 고민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 생산기지를 해외로 옮긴 중소기업이 많아서 지방에서는 ‘제조업 공동화’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은 것도 똑같다.
그러나 생산기지를 옮기기보다는 다른 경쟁요소를 찾아내서 제2의 도약을 이룬 회사가 많다는 차이점이 있다. 이들이 찾아낸 해결책은 ‘제조업의 서비스화’.
시즈오카 현의 사와네스프링. 사와네 다카요시(澤根孝佳) 사장은 회사의 비즈니스 모델을 스프링 제조업이 아니라 ‘스프링 편의점’이라고 규정한다.
각종 연구소나 대기업의 연구개발(R&D)센터가 소량의 특수 스프링을 긴급하게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에 착안, 4000여종류의 스프링을 미리 갖춰 놓고 고객이 주문을 하면 바로 택배로 배달해준다. 대신 대량주문에 비해 가격이 200배 이상 비싸다. 마진도 높다.
일본에서도 섬유업은 사양산업 취급을 받고 있지만 히로시마 현의 원단업체 가이하라는 내수는 물론 수출까지 한다. 이 회사의 경쟁력은 의류회사보다 뛰어난 시장 통찰력. 가이하라 료지(貝原良治) 사장은 물론 전 직원이 시부야, 하라주쿠, 신주쿠 등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를 직접 나가 최신 유행을 파악한다. 그는 의류회사에 다음에 어떤 패션이 유행할 것인지 제안하고 원단을 주문받는다.
일본 업체는 물론 미국의 GAP, 리바이스 등 대기업도 경험을 통해 가이하라의 예측력을 잘 알기 때문에 비싸더라도 가이하라의 원단을 산다. 원단가격에 일종의 마케팅컨설팅 비용이 들어간 셈.
LG경제연구원 이지평 연구위원은 “일본의 대기업은 물론 중소기업들도 기술력, 브랜드, 제조업의 서비스화, 독특한 비즈니스 모델, 중국과 일본의 생산네트워크 구축 등 다양한 방법으로 중국 파고를 넘고 있다”며 “한국기업들은 일본 업체들의 대(對)중국 전략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도쿄·오사카=특별취재팀
이병기 배극인 홍석민 박형준기자(이상 경제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