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박순철
해지는 깃과 날개(2)
"호령(虎賁令)은 또 무슨 일로 이렇게 일찍 왔는가?”
패공이 답은 듣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웃음기 섞어 주발(周勃)에게 물었다. 그러나 주발은 진지하기만 했다.
“오늘은 제가 선봉을 맡아 싸움을 풀어볼까 하고 찾아뵈러 왔습니다.”
그렇게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 말해놓고는 비로소 먼저 와 있는 번쾌와 관영에게 눈길을 돌렸다. 패공이 참지 못하고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러다가는 모든 장수들이 내 군막으로 모여들어 선봉을 다투게 되겠구나. 좋다! 성을 치는 데는 선봉이 따로 없다. 모두가 선봉이 되어 사방에서 한꺼번에 들이쳐 보자. 그리하면 창읍성(昌邑城)이 설령 쇠로 쌓고 끓는 물을 못 삼아 둘렀다[금성탕지] 한들 어찌 배겨낼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노관을 돌아보며 말했다.
“소하와 조참, 그리고 하우영을 부르고 밥과 국과 고기를 이리로 날라 오게 하라. 오랜만에 풍(豊) 패(沛)의 벗들과 함께 아침을 먹고 싶다.”
노관이 사람들을 불러들이자 패공은 환한 웃음과 함께 아침에 있었던 일을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그리고 음식이 들어오자 어려운 싸움을 앞둔 사람 같지 않게 웃고 떠들며 먹고 마셨다. 하지만 패공도 끝내 그렇게 태평스럽지만은 못했다. 식사를 마친 장수들이 모두 싸울 채비를 갖추러 제 군막으로 돌아간 뒤 패공이 문득 숙연해진 얼굴로 노관에게 일렀다.
“전포(戰袍)와 갑옷 투구를 갖춰 다오. 아무래도 오늘은 나도 나서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하후영을 다시 불러라.“
오래잖아 기장(騎將) 복색을 한 하후영이 불려오자 패공은 전에 없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영(영)아. 오늘은 네 수레를 타고 싸우고 싶구나. 가서 갑옷을 바꿔 입고 싸움수레[戰車]에 말을 매어라.”
하후영에게는 태복(太僕)이란 직함이 있었으나, 패공은 왠지 그만은 노관에게 그러하듯 이름으로 불렀다. 하후영이 패공보다 나이가 많이 적은 까닭도 있지만, 패공의 수레를 몰아 노관처럼 언제나 가까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갑옷을 바꿔 입으라는 것은 기장으로 싸울 때와 어자(御者)로 싸울 때에 가려야할 곳이 다른 까닭이었다.
파리가 준마의 꼬리에 붙어 천리 길을 가듯, 수많은 풍읍과 패현의 건달들이 패공 유방을 따라나서 자신의 운명을 바꾸었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하후영 만큼 앞뒤가 크게 달라진 사람도 없을 듯하다. 처음 유방을 만났을 때 하후영은 하찮은 현청(縣廳)의 막일꾼이었다. 소하가 현청의 아전들 중에서 으뜸인 주리(主吏)가 되고 조참이 옥리(獄吏)일 때도 하후영은 겨우 마차몰이꾼[御者]에 지나지 않았으며, 현령의 사자로서 패현을 공격하려는 유방을 찾아왔을 때도 하는 일은 기껏 현령의 잔심부름꾼[縣令吏]정도였다.
용력(勇力)과 무예에 있어서도 하후영은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다. 몸이 가늘고 팔 힘이 없어 현청의 말이나 돌보게 되었고, 그러다가 끝내는 현령의 마차몰이꾼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무예도 나름으로는 닦고 있었으나, 그쪽도 별다른 성취는 없었다. 마구간 뒤에서 칼쓰기를 익힌답시고 솜씨를 겨루다가 어설픈 유방의 칼에 크게 다쳐 현청을 벌컥 뒤집어놓은 일도 하후영의 보잘것없는 무예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패공이 된 유방과 함께 패현을 떠날 때 하후영이 받은 태복(太僕)이란 직함도 실은 마차몰이꾼에게 붙인 그럴싸한 이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호릉에서 소하와 함께 사수군(泗水郡)의 군감 평(平)을 무찔러 항복을 받아내면서 장수로서 두각을 드러내었다. 그 공로로 오대부(五大夫)에 오른 하후영은 그 뒤 때로는 몸소 말에 올라, 때로는 수레를 몰고 싸움터를 누비며 눈부신 공을 세웠다.
패공을 따라 탕군에서 싸울 때 하후영은 그 어떤 장수보다 매섭게 진군을 몰아 붙였으며 , 제양현(濟陽縣)을 쳐서 떨어뜨리고 호유향(戶유鄕)의 항복을 받아내는 데도 그의 공이 컸다. 옹구에서 이유(李由)의 군사를 쳐부술 때는 싸움수레[戰車]를 빠르게 몰면서 치열하게 싸운 공로로 집백(執帛)의 작위를 받았다. 또 동아와 복양 아래서 장함이 이끈 진군과 싸울 때도 수레를 빠르게 몰며 무섭게 싸움터를 휩쓸어 그 공로로 집규(執珪)의 작위를 받기도 했다.
단단히 채비를 갖춘 패공의 장졸들이 두 번째로 창읍성(昌邑城)을 들이치기 시작한 것은 그날 정오 무렵이었다. 패공의 군사들은 적이 달아날 수 있게 북쪽 성문만 남겨두고 나머지 세 방향에서 일시에 밀고 들어갔다. 아침에 패공이 이른 대로 그들을 이끄는 세 장수 모두가 선봉이 되어 성벽을 기어오르니 그 기세가 자못 날카로웠다.
패공도 갑옷 차림에 투구를 받쳐 쓰고 하후영의 수레에 올라 동 서 남 세 성벽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장졸들을 독려했다. 장수의 갑주로 몸을 감싼 하후영이 수레 모는 자리에 서서 반평생 닦은 말몰이 솜씨로 싸움수레를 빠르게 몰아 패공의 위엄을 더했다.
하지만 창읍은 그리 만만하게 볼 곳이 아니었다. 성벽이 두텁고 높은데다 쫓겨온 왕리의 군사들이 보태져 군사의 머릿수도 패공에 비해 그리 적지 않았다. 거기다가 하수(河水) 이남의 진군에게는 뺏겨서는 안 될 요충(要衝)이라 지키려는 각오도 대단했다. 장졸이 모두 이를 악물고 활을 쏘며 통나무와 돌을 던져 맡은 성벽 위를 지켜냈다.
그렇게 되자 분발도 투지도 소용이 없었다. 패공과 장수들이 앞장서 군사들을 몰아댔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늘어나는 것은 성밖에서 공격하는 쪽의 사상자들뿐이었다.
“징을 쳐서 군사를 물려라! 억지를 써서 될 일이 아니다. 다시 채비를 새로 갖춰 성을 쳐도 늦지 않다!”
이윽고 패공이 스스로 수레를 물리며 노관을 불러 그렇게 명했다. 군사들이 상하는 것을 못 견뎌하는 패공의 어짊에다 그 특유의 느긋함이 겹친 결단이었다.
그런데 그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징 소리를 들은 군사들이 성벽에서 물러나는 것을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는 패공에게 노관이 갑자기 한 곳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적입니다. 적의 구원병이 오고 있습니다!”
패공이 보니 정말로 북쪽 하늘 가득히 먼지를 피워 올리며 한 떼의 인마가 달려오고 있었다. 아직 멀어 기치를 분별할 수는 없었으나 북쪽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보아 장함이 보낸 진나라 원군임에 틀림없었다. 패공은 가슴이 철렁했으나 짐짓 태연한 척했다.
“걱정할 것 없다. 기껏해야 몇 천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성안의 적병이 쏟아져 나오면 우리는 앞뒤로 적을 받게 됩니다.”
하후영이 수레 끄는 말머리를 남으로 돌려세우며 그렇게 걱정했다. 일이 여의치 않으면 달아날 방향이었다. 장수들도 모두 새로운 인마를 보았는지, 서둘러 군사를 모아 패공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겁먹지 말라! 모두 진채로 돌아가 제 자리를 지켜라!”
번쾌가 긴 칼을 빼들고 소리쳐 군사들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래도 한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성안에서 치고 나오지 않는 일이었다. 무엇 때문인지 진군은 성벽 위에 눌러앉아 바라보기만 할뿐, 성문을 열고 나오려 하지 않았다. 그때 다가오는 인마를 말없이 노려보고만 있던 주발이 말했다.
“패공, 염려 마십시오. 저것은 적군이 아닙니다. 복색과 병기가 이것저것 뒤섞인 데다 기치도 검은 색이 아닙니다. 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우리편인 듯합니다”
패공이 그 사이에도 빠르게 다가들고 있는 인마를 보니 눈이 밝은 주발이 말한 대로였다. 가까운 곳에 근거를 둔 제후군이거나 다른 곳에서 일어난 의군(義軍)이 싸움을 도우러 온 듯했다. 성안의 적군이 가만히 있었던 것은 그걸 먼저 알아차렸기 때문임에 틀림없었다.
패공이 반가운 마음에 수레를 그쪽으로 몰게 해 다가오는 그들을 앞서 맞았다. 놀라 바라볼 때와는 달리 군사는 많아도 3000을 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윽고 서로 얼굴을 알아 볼만한 거리에 왔을 때 패공이 먼저 두 손을 모으며 앞서 말을 타고 오는 장수에게 물었다.
“앞에 오는 군사는 어디서 오는 군사며 장군은 뉘시오?”
“저는 거야택(巨野澤)에 머물러 있던 팽월(彭越)이란 놈입니다. 따르는 젊은이들이 있어 함께 진나라의 남은 세력을 쓸어내다 보니 군세가 불어나 그럭저럭 2000을 넘기게 되었습니다. 다시 선 초나라에서 진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특별히 군사를 내었다기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려고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앞선 장수 또한 공손히 두 손을 모으며 그렇게 받았다. 나이는 패공 또래쯤 될까, 키는 훌쩍 했으나 비쩍 마른 몸에 눈빛이 기이하게 빛나는 사내였다. 말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패공을 뜯어보고 있는 것이 그의 조심성과 기민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팽월의 얼굴을 대하기는 처음이었으나 거야택과 이어진 그 이름은 패공의 귀에 그리 설지 않았다. 그때 수레 곁에 섰던 관영이 반가운 목소리로 팽월을 아는 체했다.
“달려오시는 모습이 낯익다 했더니, 팽형이셨구려. 구름 속에 숨은 신룡(神龍)처럼 거야택에 숨어 세상에 몸을 드러내지 않던 팽형이 여기까지 왠일이시오? ”
수양현에서 비단장수를 하면서도 패현 저잣거리 건달들과 손이 닿을 만큼 발이 넓던 관영이었다. 그가 그렇게 소리치자 패공도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거야택에 숨어산다는 간 크고도 날렵한 수적(水賊) 얘기였다. 무리를 모아 도둑질을 하는데 뜻밖의 곳을 털고 또 재빨리 사라져, 진나라 관병이 고변을 듣고 달려가 봤자 번번이 허탕이라는 소문이었다.
“이거 관형 아니시오? 관형이야말로 저잣거리에서 비단이나 찢어 파는 분이시라더니 벌써 갑옷 투구가 잘 어울리시는구려.”
팽월이 그렇게 농담 섞어 관영의 말을 받았다. 그러나 눈길은 끊임없이 패공을 살피고 있었다.
(경계가 많은 사람이구나. 그만큼 변화에 대응하는 것은 민첩하겠지만 항심(恒心)을 지켜가기에는 머리 속에 너무 많은 것이 들어차 있다.......)
팽월의 눈빛을 받으며 패공은 속으로 그렇게 헤아렸다. 하지만 겉으로는 평소처럼 느긋하고 무심한 말투로 말했다.
“거야택에 대협(大俠)이 한 분 머물고 계신다더니 바로 장군이셨구려. 게다가 이미 관 중연(中涓)과 알고 계신다니 이 또한 우연은 아닌 듯하오. 마침 싸움이 여의치 않아 군사를 잠시 물리려던 참이니 장군도 가까운 곳에 진채를 내리고 함께 앞일을 의논해 봅시다.”
그리고는 슬며시 관영에게 일러 팽월의 군사들이 자리잡기를 도와 준 뒤에 팽월과 함께 자신의 군막으로 오게 했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