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초, 무슨 일로 쫓겨 다닐 적이다. 계훈제 선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누가 만나자니 신라여관(호텔) 찻집으로 오라고. 우리는 그같이 비싼 집에서 만난 적이 없었다. 아마도 우리를 쫓느라 노상 뒷골목이나 뒤지는 기관원들의 어림을 비껴가자는 계 선생의 지략일 거라고 생각됐다.
막상 온다는 사람이 안 와 서둘러 찻값을 치르려던 계 선생의 목소리가 커졌다. “찻값이 왜 이리 비싸. 그까짓 볶은 콩 우려낸 물 값이 국수 네 그릇 값보다 많으니….” 찻집 사람이 “여기는 그런 데”라고 받아친다.
“뭐야, 여기는 돈을 물 타 먹는 도둑놈들만 사는 데란 말이야? 민주화란 딴 게 아니구먼. 군사독재와 함께 썩어문드러진 것들도 모두 청산하는 것이지.”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얼른 계 선생의 팔짱을 끼고 간 곳이 시장 뒷골목의 허름한 찜닭집.
거기서 닭 반 마리, 국수 한 그릇, 대포 한 잔을 시켰는데 계 선생이 워낙 찜닭을 좋아하는 터라 나는 손도 안 댔는데 어느새 뼈만 남았다. 내가 아주머니에게 닭대가리나 한 사발 달라고 했을 때다.
계 선생이 슬며시 일어나며 곧 돌아오겠다는 것이다. 그때까지 먹은 값은 되겠는데 닭대가리를 또 시켰으니 돈을 구하러 가신 모양이었다. 닭대가리는 거저인 것을 모르고. 그 게딱지같은 집에 손님은 밀리고 밤은 깊어가고 일어나자니 돈은 없고 에라 모르겠다, 대포를 석 잔째 마실 적이다.
“백 선생이지요. 잠깐 가셔야겠는데요.” 철컥 고랑이 채워져 끌려나올 때 계 선생이 골목으로 접어들다 이를 보고 멈칫 몸을 사리신다. 그때 닭집 아주머니가 내 등에다 칼을 꽂는다. “닭대가리를 공으로 먹었으면 찜닭 값은 내야지. 그냥 가니까 밤낮 잡혀다니지. 염병할….”
그리고 세월은 흘러 20여년. 21년 일한 일터에서 한 달에 받는 돈이 세금, 손배 가압류, 집세 따위를 빼면 12만9000원. 그걸 갖고 어떻게 사느냐고 울부짖다 몸에 불을 지른 한진중공업 노동자를 기리는 모임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신문을 보니 바로 그 신라여관과 권노갑씨 이야기가 있었다. 북쪽과 거래 트는 데 도와주겠다며 현대재벌로부터 200억원 받고 이어 3000만달러를 받았는데 그 현장검증을 한다는 기사다.
또 한 귀퉁이 기사를 보고는 늙은 주먹일망정 내 손의 식은땀마저 으스러지는 걸 느꼈다. 권씨가 바로 그 비싼 집에서 상어지느러미를 곁들여 한 끼 밥값이 30만원 하는 것을 일주일에 서너 차례씩 먹었다는 그 집 일꾼의 증언이었다. 점심 한 끼에 30만원? 찜닭 반 마리 값의 예순 배다. 그것에 네댓 사람이 술까지 곁들이면 140만원. 그걸 먹으며 뇌까린 민주화와 통일은 어떤 것이었을까. 도저히 내 힘으로는 어림할 수가 없어 두 다리가 휘청거렸다.
“내가 잘못 살아 온 것은 아닐까. 그렇다. 내가 잘못 살아 왔다. 아니다. 아니란 말이다. 이제부터 나의 명제, 참 민주화다 통일이다 하는 것들은 첫판부터 다시 차름(시작)하는 수밖에 없겠구나. 남은 목숨 몽창 걸고.”
햄버거 간판을 흔드는 가을바람보다 더 세차게 늙은 주먹이 울었다.
※ 이 글은 백기완 소장이 여러 지인들에게 동시에 보낸 편지글로서 필자의 양해를 구해 게재합니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