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4월 완공한 일본 나리타공항의 새 활주로 모습. 사진 아랫부분에 보이는 토지의 소유자들이 합의해주지 않아 활주로는 원래 계획보다 300m 짧은 2180m에 그쳤다. 사진제공 아사히신문
《최근 경제의 부활 움직임에 고무된 일본 언론들은 ‘신(新)일본경영’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일본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11월 4일자 ‘신일본형 경영이 보인다’란 특집에서 도요타, 캐논, 화학업체 가오 등 최근 수익성이 좋은 기업들은 일본적인 특성을 유지하면서 효율성을 강화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고 보도했다. 또 소니나 후지쓰처럼 서구식 경영을 추구한 기업들이 실적이 좋지 않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녹슨 엔진을 다시 닦아 효율만 회복하면 일본이 다시 세계 경제를 주도할 수 있다”는 것이 많은 일본인들의 생각.
그러나 일본문화연구소 초청으로 1년 예정으로 교토에 머물고 있는 이어령(李御寧) 전 문화부 장관은 “글로벌 지식경제시대에 일본은 아직도 자신들의 성공을 가져온 제조업에 매달리고 있다”며 최근 일본의 변화는 한계가 있다고 잘라 말한다. 이 전 장관은 1982년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라는 책을 펴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삼성경제연구소 이우광 수석연구원은 “일본은 경제적인 문제 외에도 절대인구의 감소, 여성 인력의 사회 진출 미흡, 획일적인 교육과 대학의 경쟁력 저하 등 사회 전체의 활력이 떨어지는 문제를 갖고 있다”며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는 한국은 일본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창조적 파괴’가 없는 일본=왜 일본에서는 영국 금융의 빅뱅(Big Bang), 미국의 리스트럭처링과 대기업 인수합병(M&A) 열풍, 뉴질랜드와 호주의 정부 대혁신처럼 급진적인 변화가 나타나지 않을까.
최근 일본 전자업체의 변화를 연구 중인 삼성경제연구소 이용화 수석연구원은 “점진적인 개선을 통한 변화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도약이 필요한데 기업은 물론 일본사회 전체가 창조적인 파괴 과정이 드물다”고 진단했다. 90년대 미국이 일본에 다시 역전한 것은 제품을 일본기업보다 더 잘 만들기보다는 다른 기업들이 따라올 수 없는 독특한 경영전략을 펴거나 정보기술(IT) 등 새로운 기술을 빨리 활용해서인데 일본은 이런 혁신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
LG경제연구원 이지평 연구위원은 “일본문화 자체가 집단을 우선시하고 화합을 중시하는 ‘화(和)’의 문화이기 때문에 급격한 변화를 싫어한다”며 “기업의 경영자도 전략적 판단을 내리는 리더라기보다는 각 사업부의 의견을 매끈하게 조정하는 ‘조정자’의 역할에 치중한다”고 설명한다.
또 사회 전반의 변화가 시작되려면 무엇보다 정치 엘리트가 바뀌어야 하는데 정-관-재(政-官-財)로 이어지는 ‘철의 3각 체제’가 강고하게 버티고 있는 것도 문제.
진창수 세종연구소 국제정치경제연구실장은 “대기업과 은행, 농민과 지방건설업자는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인을 뽑고 정치권은 이들의 이해를 보장하는 낡은 정치구조에 변화가 없다”며 “변화의 주체가 돼야 할 소비자나 도시 근로자층의 유권자들의 움직임도 미약하다”고 분석했다.
▽자본시장의 규율이 약한 일본=자본시장의 중요한 기능의 하나는 좋은 기업을 북돋우고 불량기업을 솎아 퇴출시키는 것. 그러나 일본의 경우 자본시장이 취약하다보니 효율성이 떨어지는 기업의 퇴출이 느리고 그 결과 경제 전체의 활력이 떨어진다.
나아가 금융산업 내에서도 부실업체가 퇴출되지 않고 있어 금융업 자체가 부실덩어리로 부담이 되고 있다. 금융권은 1992년 이후 2002년 3월까지 82조엔의 부실채권을 처리했지만 금융권이 안고 있는 부실채권 규모는 32조엔에서 42조엔으로 오히려 늘어났다.
이지평 연구위원은 “수익을 못내는 건설업체와 대기업들이 아직도 숨을 이어가면서 부실채권이 늘고 있다”며 “부실채권을 빨리 처리해야만 은행의 대출 여력이 회복되면서 경제가 활력을 얻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자본시장 규율이 엄격하지 못하다는 것은 ‘기업지배구조가 낙후돼 있다’는 말과 동의어. 각 계열사가 상호출자로 얽혀 있는 시스템에 익숙한 경영자들에게 ‘주주가 회사의 진짜 주인’이라는 개념은 희박하다. 사외이사를 채택하는 기업은 아직도 극소수. 경영진이 자신을 ‘주주의 이익을 대표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임직원 대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수익성보다는 각 사업부의 이해관계 조정을 우선시한다.
이우광 수석연구원은 “이렇다보니 기업이 만들어낸 부가가치 중 근로자가 가져가는 비율(노동소득분배율)이 선진국 중 일본이 가장 높다”며 “당연히 기업의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공공부문의 혁신이 없다=지난달 21일 도쿄 시내 닌교초 부근의 한 공사현장. 낡은 하수도관 하나를 교체하면서 트럭 3대와 기중기 1대, 인부 15명이 일하고 있었다. 절반 이상이 하는 일 없이 놀고 있었다. 공공부문 비효율성의 작은 현장이었다.
오쿠다 히로시(奧田碩) 일본 경단련 회장 겸 도요타 회장은 공공연하게 “중앙정부의 행정개혁이 이루어져야 정부가 지방정부와 공사의 혁신을 밀어붙일 수 있는데 중앙정부의 개혁이 형식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공공부문의 혁신이 지지부진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1부22성청의 정부조직이 1부12성청으로, 128개의 관방 및 국이 96개로, 1200개의 과가 1000개로 줄었지만 숫자놀음에 불과하다는 것.
예를 들어 건설성, 운수성, 국토청, 훗카이도 개발청 등 4성청이 통합된 국토교통성의 경우 단순히 4개 부처를 합쳐놓은 것에 불과하지 군살빼기가 이루어진 진정한 행정개혁이 아니라는 지적. 총무청과 자치성, 우정성이 통합된 총무성도 마찬가지.
정부와 공기업, 각종 산하단체에 만연된 낙하산인사 관행도 여전하다고 일본 언론은 지적한다.
경제산업성의 한 중견간부는 “고위 관료와 정치권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개혁 노력은 ‘찻잔 속 태풍’에 그치고 있다”며 “중견 관료들은 자신들이 주역으로 활동할 시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숨지었다.
일본 은행의 부실채권 현황 (단위:조엔) 1998년 3월1999년 3월2000년 3월2001년 3월2002년 3월총 대출금553.1506.6496.2494.2473.2부실채권 잔액29.829.630.432.542.0부실처리 누계액45.158.865.771.881.5부실채권 비중5.4%5.8%6.1%6.6%8.9%자료:일본 금융청
도쿄=특별취재팀
이병기 배극인 홍석민 박형준기자(이상 경제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