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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리뷰]'우리의 릴리'…사랑? 배우되는 게 더 급해

입력 | 2003-12-02 17:30:00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영화 ‘우리의 릴리’. 사진제공 판시네마


프랑스의 클로드 밀러 감독이 연출한 영화 ‘우리의 릴리’는 사랑과 예술적 욕망 때문에 상처받고 체념하는 인물들을 그린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갈매기’에서 사랑하는 인물들의 관계와 그들의 예술적 욕망은 ‘샴쌍둥이’처럼 떨어질 수 없다. 주요 인물들이 모두 연극과 관련된 일을 하는 예술가들이기 때문이다. 원작에는 연인 니나를 주인공으로 하는 트레블레프의 ‘극중극’이 등장한다. 영화에서는 이를 초보 감독 줄리엥의 ‘영화 속 영화’로 설정을 바꾸어 놓고 시작한다.

영화는 인물간의 사랑이 서로 얽혀 한쪽 바퀴가 부서진 수레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맴돈다는 점, 사랑하지만 끊임없이 서로 상처를 줄뿐 소통하지 못하고 고독한 길을 간다는 점에서 원작에 충실하다. 그러나 작품의 제목이 ‘갈매기’가 아니라 ‘우리의 릴리’인 것은 이 영화가 ‘릴리’의 갈등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을 말한다.

‘스위밍 풀’에서 매혹적 모습을 선보였던 뤼디빈 사니에는 어리고 순수해 보이면서도 팜므파탈적 이중성을 매력적으로 열연해 이 영화의 대중성 확보에 기여한다. 원작의 인물구도와 주된 갈등은 살리되, 감독의 해석은 조금 다르다는 것은 영화의 결말 부분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트레블레프의 자살로 마감하는 원작은 ‘사랑과 예술적 이상’이 현실과 화합하지 못하는 비극적 결말을 보여준다. 그러나 영화는 ‘자신들의 과거를 소재로 만든 영화’의 주인공만 자살하는 것으로 끝난다.

결말을 이렇게 바꾼 클로드 밀러 감독의 의도는 무엇일까. 첫 장면부터 러브신으로 시작하며, 릴리의 성적 매력을 부각시키는 등 원작보다 더 대중적 코드에 기대어 있는 ‘우리의 릴리’를 통해 자신의 영화작업을 되돌아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현실, 즉 대중성과 예술적 이상이란 해결할 수 없는 과제를 자신의 작업 속에서 되짚어보고자 하는 의도 말이다.

자신의 과거를 영화로 재현하는 줄리엥, 배우로서 성공하기 위해 사랑마저 부차적으로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는 영화에는 참여하고 싶어 하는 릴리의 모습과 원작의 결말을 뒤튼 감독의 심정은 많이 닮아 있다. 자살하는 총소리가 난 후 쓸쓸히 언덕을 넘어가는 릴리의 마지막 뒷모습은 바로 감독 자신의 심정을 형상화한 것이다. 5일 개봉. 18세 이상 관람 가.

황영미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