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9일 일본 도쿄 시내 ANA호텔의 일식당에서 일본의 저명한 산업 전문가인 이타미 히로유키(伊丹敬之) 히토쓰바시대 교수와 한국 민간경제연구소의 대표 격인 삼성경제연구소 정구현(鄭求鉉) 소장이 만났다.
두 전문가는 ‘일본 경제와 기업의 변화’를 주제로 약 2시간20분간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당시 정 소장은 노무라종합연구소 등 일본 주요 연구소와 연구 협력 방안을 협의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 중이었다. 이날 대담은 영어로 진행됐다.
▽정구현 소장=최근 일본 경제가 부활한다는 이야기가 각 연구소나 언론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정말 일본 경기가 살아나고 있다고 보십니까.
▽이타미 히로유키 교수=10년 만에 이런 분위기는 처음입니다. 국내총생산(GDP)의 실질 성장률과 기업의 수익이 좋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 경제의 체질이 완전히 변했다고 하기에는 아직 증거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중요한 건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이 자신감을 회복한 것이죠. 최근 경제단체연합 모임에서 만난 기업의 최고경영자 20여명은 10여년 만에 처음으로 희망이 있다고 이야기하더군요. 솔직히 저 자신도 그동안 비관적인 전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정=아직 일본기업의 체질이 변했다고 하기에는 조금 이르지 않을까요. 1995년이나 2000년처럼 외부 변수 때문에 잠깐 좋아졌다가 다시 가라앉을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이타미=일본의 경영자들이 자신감을 회복한 것은 혹독한 기업구조조정을 어느 정도 끝냈고 그 과정에서 기술력을 비롯해 일본 기업의 핵심역량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인 이유로 지지부진했던 금융부분의 부실자산 처리 속도도 한결 빨라졌습니다. 과거 은행의 인수합병(M&A)은 환자들을 그냥 모아놓은 것이지 정작 중요한 외과수술은 여러 가지 이유로 미뤄진 게 사실입니다. 이제 수술이 진행 중이지요. 문제는 내수가 본격적으로 살아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정=몇 년 만에 일본에 와보니 후지은행과 다이이치간교은행 등이 없어져서 놀랐습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였지만 금융 구조조정은 정치적인 계산이 끼어들면 실패하기 쉬운 법입니다. 그런데 일본의 내수가 살아나지 않고 있는 이유는 뭐라고 보십니까.
▽이타미=‘경제의 절반은 심리’라는 말을 지난 13년간 실감했습니다. 외환위기 직후 조사에서 한국인은 90%가 미래가 나아질 것으로 보는데 오히려 외환위기를 겪지 않은 일본인의 70%는 미래가 더욱 나빠질 것으로 답할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이제 기업인들이 자신감을 되찾아 설비투자를 늘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분위기가 점차 소비자에게 퍼져갈 것으로 봅니다.
▽정=기업의 체질이 정말 변했다고 보십니까.
▽이타미=최근에 만난 일본의 철강업체 JFE의 사장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난 30년간 사실상 과점체제를 유지해오며 경쟁을 해오지 않았다. 신일본제철의 리더십 아래 암묵적인 카르텔을 형성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진짜 경쟁을 한다.” 진짜 변화가 시작된 거죠. 마쓰시타는 구조조정 전에 그룹 내에 3개 회사가 별도로 연구개발(R&D) 조직을 가지고 팩스 단말기를 생산할 정도로 비효율적이었지만 구조조정을 통해 이런 비효율을 쳐냈고 경쟁력이 떨어지는 상품은 중국으로 옮겼습니다.
▽정=인력 감축을 했다고 하지만 대부분 자회사로 보내는 등 미국식 경영혁신 시각으로 보면 부족한 점이 여전히 많은 것 같습니다.
▽이타미=도요타, 가오, 마쓰시타, 캐논 등 최근 기업실적이 좋은 기업은 미국식 경영스타일로 운영하지 않습니다. 경영모델보다는 기업의 성과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사실 일본기업의 내부문제는 1980년대 말 버블 시기와 맞물려 연공서열식 시스템이 굳어지면서 기업의 부담이 커지고 조직이 활력을 잃은 것이었습니다. 이런 연공서열 시스템은 고령화 사회에서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도요타의 경우 겉으로는 ‘하모니(화·和의 번역)’를 내세우지만 진짜 중요한 경영의사결정은 능력 있고 책임 있는 실무자들이 내립니다. 이제 전체 일본기업에서 연공서열이 파괴되고 실력주의가 뿌리내리고 있다고 봅니다.
다만 지금 일본 사회의 헤게모니는 전후 베이비붐 세대에 태어난 사람들이 잡고 있는데 이들의 이익에 어긋나는 급격한 변화는 어렵습니다. 이들이 은퇴하는 2010년경이면 그 변화가 더욱 빨라질 것으로 보입니다.
10여년간 조금씩 변화를 해왔기 때문에 바깥에서 보기는 느려 보이겠지만 일본기업은 효율성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향해 일관되게 변해왔습니다.
▽정=한국도 외환위기 이후 엄청난 충격과 변화를 겪었습니다. 외부에서 변화가 강제되고 정부 관료들이 이를 더욱 밀어붙이다 보니 한국의 실정과 맞는지 검토할 시간도 없이 주주자본주의를 받아들였습니다. 작은 변화가 쌓여 큰 변화를 이루어내는 게 일본의 장점이라는 데는 동의하지만 과연 국경 없는 자본주의 시대에 일본식 자본주의를 고집할 수 있을까요.
▽이타미=일본과 유럽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모델이며 일본은 그중에서도 종업원이 특히 강조되는 종업원 자본주의입니다. 미국식 해고 문화는 근로자들이 갖고 있는 지식과 조직에 대한 충성심을 없애버리기 쉽죠. 일본의 경쟁력은 생산현장에서 나오기 때문에 근로자나 엔지니어들의 충성심이 중요합니다. 해고는 정말 마지막 수단이죠. 일부 일본기업들이 종신고용 원칙을 깼다고 해서 미국식으로 간다고 보는 것은 착각입니다.
지난해 말 미타라이 후지오(御手洗富士夫) 캐논 사장이 미국의 뉴욕에서 가진 투자설명회(IR)에서 ‘종업원이 먼저냐 투자자가 먼저냐’는 투자자들의 질문에 주저 없이 종업원이라고 답하면서 “종업원에게 좋은 회사가 되어야 투자자에게도 좋은 회사”라고 설명했습니다. 이것이 일본식 경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한 사회가 어떤 시스템으로 작동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더 효율적이고 성과가 좋으냐가 중요하지 않을까요. 최근 독일이 미국식으로 간다고 말을 하는데 일부 비합리적인 기업지배구조를 바꾸는 것이지 경제모델 자체를 앵글로색슨형으로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정=일본은 사외이사제도를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데. 경영에 대한 외부통제를 어떻게 합니까. 한국은 대주주의 지분과 지배권한 행사간의 갭을 측정해 정부가 불이익을 줄 만큼 경영권에 대한 통제가 심합니다.
▽이타미=올해 일본 기업법이 개정돼 사외이사제도가 도입됐지만 3000개 상장사 중 69개만이 사외이사제를 채택했습니다. 사외이사 시스템을 도입한 기업들은 경영능력을 검증받지 못한 2세가 경영권을 이어받아 여론이 좋지 않거나 성과가 좋지 않은 기업들입니다. 자본시장의 눈치를 보는 거죠.(웃음)
가장 중요한 것은 사장의 선임 과정이 능력 있는 사람이 발탁될 수 있도록 투명하고 공정한가 하는 것이죠. 가장 투명한 견제는 종업원이 할 수 있습니다. 능력 없는 사장이 임명되면 종업원들이 거부합니다. 일본에서 적대적 M&A가 어려운 것은 이 때문입니다.
도요다 일가에서 도요타의 사장이 나왔다고 말썽이 난 적이 없습니다. 도요다 일가가 가진 주식은 2%에 불과하지만 도요타의 상징적인 중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경영도 물론 잘 합니다.
▽정=부상하는 중국에 대비해서 일본의 대비책이 있습니까. 중국은 올해부터 미국을 제치고 한국의 최대 수출시장으로 떠올랐습니다. 대홍콩 수출분을 제외하고도 그렇지요.
▽이타미=일본은 이제 중국을 경쟁자로 보지 않습니다. ‘윈-윈(Win-Win)’ 구조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올해 대중(對中) 수출증가율이 19%에 이를 정도입니다. 중국의 고도 경제성장은 일본에도 이롭다고 봅니다. 다만 기술유출을 방지하면서 연구개발이나 핵심활동은 일본에서 하고 최종 제품만 중국에서 만들면 됩니다. 일본과 중국의 관계는 더욱 깊어져야 합니다.
▽정=일본이 지난 10여년의 불황을 겪으면서도 사회가 이처럼 안정되어 있다는 것이 일본의 저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인의 저력을 바탕으로 일본경제가 다시 소생한다는 것은 동아시아 국가들에는 좋은 소식입니다. 특히 일본기업들이 일본적 경영의 특징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 국제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 구조조정을 한다는 점은 매우 인상적이군요. 경제 위기 때문에 영미식 자본주의가 단기간 내에 이식된 한국의 경우와 대비되기 때문입니다.
한일 양국 모두에 중국의 급성장은 크나큰 도전이며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한일 자유무역협정(FTA)을 계기로 양국 기업이 더욱 협력하면서 국제경쟁력을 갖도록 해야겠습니다.
정리=특별취재팀
이병기 배극인 홍석민 박형준기자 (이상 경제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