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지역 국가들은 1997년의 금융위기로 인해 느낀 바가 많다. 첫째, 경제성장을 위해 국제금융시장을 활용하지 않을 수 없으나 여기에는 상당한 위험이 따른다는 점이다. 국제금융자본이 수시로 변덕스레 움직이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자본 유출의 희생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역내 국가들이 무역과 투자 등을 통해 긴밀히 연계돼 있어 금융위기가 상호 ‘전염’되기 쉽다는 점이다. 셋째, 금융위기 대책 차원에서 국제통화기금(IMF)에 의존하는 데에 상당한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동아시아지역 금융협력 긴요 ▼
그래서 동아시아 국가들은 나름의 금융협력체제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데 공감하게 됐다. 그 결과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의 10개 회원국 및 동북아의 한국 중국 일본 3국을 중심으로 금융협력 방안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금융위기 당시 이들이 보유했던 외환의 총액이 7000억달러 정도였는데 태국 인도네시아 및 한국 등 세 위기 당사국이 필요로 했던 긴급지원 총액이 1120억달러에 못 미쳤다는 사실은 동아시아 금융협력의 잠재력을 말해 준다.
그래서 이들 13개국은 그간 상호 긴급유동성지원 원칙에 합의하고 이를 위해 총 335억 달러에 이르는 유동성 스와프(외환위기를 맞은 나라의 화폐를 다른 나라가 보유한 달러화로 교환해 주는 것) 협약을 쌍쌍이 체결했다. 앞으로 이를 토대로 아시아통화기금(AMF)의 발족으로 가는 게 바람직하다.
아울러 금융통합의 첫 단계로 환율정책 협력 메커니즘이 도입되고 심화돼야 한다. 자본시장의 통합을 위해 아시아 채권시장을 개발하기 위한 협력도 추진돼야 한다. 금융위기에 취약한 역내국들의 원죄는 국내 금융부문이 너무 낙후된 데에 있다. 각국의 금융선진화를 위한 협력도 요구된다. 이처럼 동아시아는 여러 부문에 걸친 금융협력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됐다. 그러나 동시에 그 추진의 어려움도 절실히 느끼기 시작했다. 당장 유동성 지원체제의 기반이 되는 상호 정책감시체제의 운영 방안을 두고도 답보를 면치 못하고 있다.
지역금융협력 추진의 가장 큰 장애요인은 중국과 일본 및 ASEAN권 상호간의 불신이다. 또 하나는 각국 국내 금융의 취약성에서 오는 대외협력의 제약이다. 지역금융협력을 발전시키려면 우선 반복적인 토론과 공동연구를 통해 이견을 해소해야 한다. 또 각국의 금융선진화를 위해 협력하고 나아가 지역협력 기반조성 차원에서 각종 금융제도를 서로 평가하고 그 개선을 위한 대안을 함께 모색하며 제도를 수렴해야 한다.
이런 일들이 효과적으로 추진되려면 이를 위한 정치적 신뢰의 창출에 앞장서고 기술적 대안 도출에 창의적으로 기여하는 나라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간사국’으로 가장 기대를 모으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한국은 정치경제적 위상이나 발전단계 면에서 ‘중간국가’다. 따라서 신뢰 창출에 앞장 설 수 있다. 또 한국은 금융위기의 극복 과정에서 금융개혁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이뤄낸 경험을 갖고 있는 ‘모범국’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따라서 금융협력의 내용면에서 가장 창의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도 하다.
▼새질서 창출 한국이 앞장서야 ▼
최근 서울에서 마닐라체제그룹(MFG)회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중소기업금융당국자회의 ASEAN+3 재무차관회의 등 지역금융협력을 위한 국제회의가 3건이나 열렸다. 또 내년 아시아개발은행(ADB) 연차총회 등 향후 중요한 회의가 유치돼 있다. 및 ASEAN+3 재무장관회의, 후년의 APEC 재무장관회의 등이 그것이다. 금융정책당국이 여러 국제회의를 적극 유치하는 것은 한국이 21세기 아시아지역 금융질서의 창출에 앞장섬으로써 지역경제 운영에서 주도적 위치를 점하고자 하는 것이리라. 역내 금융질서 운영의 고지를 차지하지 않고서는 동북아 경제의 중심권 진입도 어려울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이러한 행사 유치가 역내 금융질서의 내용에 대한 전략적 영향력 행사로 효과적으로 연결되느냐에 있다. 전문관료들과 같이 고민하고 그들의 노력을 국제적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대통령의 의지와 전략, 그리고 일반 국민의 성원이 요청된다.
양수길 전 주OECD 대사 태평양경제협력회의(PECC)금융포럼 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