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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프리즘]장소원/정치인들 무엇하고 있는가

입력 | 2003-12-02 18:41:00


1980년대 초반 필자가 대학생이던 무렵은 시위 자체가 허락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적법한 집회 및 시위를 보장하고 안녕과 질서를 도모하기 위한 법률인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은 당시에도 물론 존재했다. 그러나 그 무렵에는 많은 사람이 이 법의 보호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집시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잡혀 들어가곤 했으니 참으로 암울한 시절이었다. 당시에 금지된 시위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가족과 친지들의 기대를 철저하게 저버려야 했고, 때로는 아예 목숨까지도 내걸어야 했다. 그래서 이들의 행위가 수업 거부로 이어지고 화염병이 하늘을 날아다녀도 사람들은 오히려 이들을 안쓰러워했던 것이다.

▼높아가는 시위대 확성기 볼륨 ▼

세월이 달라졌다. 오늘날의 집시법은 말 그대로 시위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다. 미리 신고만 하면 웬만한 장소에서는 집회와 시위가 허용된다. 그래서 서울에서 찾을 수 있는 비교적 넓은 장소이자 서울의 한가운데인 광화문 일대는 이른바 집회와 시위의 메카가 돼버렸다. 그래서인지 ‘전국민중연대’는 이미 내년 말까지 광화문 일대의 집회신고를 선점해 놓고 있다고 한다.

요즘 사무실이 밀집한 도심에서 집회와 시위를 벌이면서 고성능 확성기로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틀어놓는 행위는 소음공해를 넘어서서 가히 소음폭력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다. 참다못한 광화문의 교보빌딩측은 법원에 집회금지 가처분 신청을 낼 예정이라고 한다. 오죽했으면 그런 결정을 했을까. 법으로 보호받는 집회와 시위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피해를 주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커다란 문제다.

집회와 시위로 인한 피해는 소음에 그치지 않는다. 각종 시위가 전국에서 잇달아 일어나면서 시위현장에서 볼 수 있는 폭력의 정도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전북 부안에서는 핵폐기물 처리장 건설 문제로 다섯 달이 다 되도록 시위와 진압이 반복되고 있다. 지역경제가 말이 아닌 것은 물론이고 각종 시위와 집회에서 중경상을 입은 주민은 500여명이고 부상한 경찰도 235명이나 된다. 이제는 시위가 있다 하면 쇠파이프에 낫과 죽창까지 등장하니 분위기가 살벌하기 이를 데 없다.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화염병이 다시 나타나고 진압경찰을 공격하는 새총에는 굵은 나사못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시위가 이처럼 폭력적이 된 것은 우는 아이에게 떡 하나 더 주고 목소리를 크게 내야만 싸움에서 이기는 우리의 사회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울며 보채기 전에 주어야 할 떡은 주고, 작은 목소리로 하는 항의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주체는 정치인들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의 정치인들은 민생을 돌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노무현 대통령의 특검법 조건부 거부에 맞선 한나라당의 강경 대응으로 정치 기능이 사실상 정지되었기 때문이다.

부안의 핵폐기물 처리장 문제는 어떤 식으로 해결할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LG카드 부실 사태로 인해 혼란에 빠져든 금융시장은 언제쯤에나 제자리를 찾도록 할 것인가. 2004년도 정부예산안은 언제 통과시키며, 이라크 파병 동의안 문제는 또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수능 17번 문제도 결국은 우리의 교육제도 전체를 꼼꼼히 따져보지 않고는 말끔히 해결할 길이 없어 보이는데 이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할 정치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들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民生 살피지 않는 정치권 ▼

우리는 지난 월드컵축구대회 때 광화문에 모여 ‘대한민국’과 ‘오, 필승코리아’를 외치며 대한민국 국민임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바로 그 광화문에서는 지난달에도 민주노총 집회가 있었다. 그러고 난 후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도 노조활동을 지켜봤지만 그렇게 큰 마이크 소리와 노랫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다른 사람의 업무활동을 방해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라고 했다는 외국은행 지점장의 항의를 신문에서 읽었다. 이처럼 지당한 지적을 외국인으로부터 받게끔 되어버린 우리의 정치 현실이 다시 한번 참담하게 느껴졌다.

장소원 서울대 교수·국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