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8일 미국 펜타곤에서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을 만나 악수하는 팜 반 짜 베트남 국방장관의 얼굴에 미소가 흘렀다. 양국의 국방장관이 미국에서 만난 것은 1975년 4월 베트남전쟁 종전 이후 28년 만에 처음이다.
이날 양국 국방장관은 군사 부문에서 서로 협력하기로 의견을 같이함으로써 1994년 빌 클린턴 행정부의 베트남 금수조치 해제, 그리고 이듬해 양국 외교 관계 정상화 이후 미-베트남 관계가 급진전되고 있다.
미국이 ‘치욕적인 전쟁’으로 규정하고 있는 베트남전쟁 이후 서로를 적대시해 왔던 양국이 서로를 다시 ‘파트너’로 보기까지는 정확히 2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지난달 19일 또 한 번의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다. 베트남 국방장관의 방미에 대한 답방 형식으로 미국의 4100t짜리 프리깃함 벤더그리프트호가 호치민항에 입항한 것. 미군 함정의 베트남 입항 또한 종전 이후 처음이다.
이달 중 미국과 베트남간 민항기 직항도 28년 만에 재개될 전망이다. AP통신 등 외신들은 이 일련의 사건들은 20세기 이념의 시대가 끝나고 21세기 실리주의 시대가 시작됐음을 상징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양국의 관계 급진전은 실리 추구에 다름 아니다
미국으로서는 범세계적 대테러 전선을 형성하고 중국의 남진(南進)을 견제하는 데 캄보디아, 라오스를 포함하는 인도차이나반도의 맹주 베트남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또 베트남전쟁 참전 중 실종된 1800여명의 시신을 찾는 데도 베트남 정부의 도움이 필요하다.
최근 3년간 7% 전후의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는 베트남으로서는 세계 경제에 편입돼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 미국이 지원이 필요하다.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바라고 있는 베트남에 미국은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6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대미 무역도 베트남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다.
가장 큰 위협 세력으로 생각하는 중국을 견제할 수 있다는 점도 미국과의 군사 협력을 거부할 수 없는 이유다.
여전히 많은 베트남인들이 베트남전쟁 때 미군이 뿌린 고엽제와 지뢰, 불발탄으로 고통받고 있지만 ‘과거를 뒤로하고 미래를 지향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미국과의 돈독한 관계를 쌓아가는 베트남의 미래가 주목된다.
김성규기자 kims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