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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포석 人事의 세계]인사 대상자들의 목소리/'오버 액션'

입력 | 2003-12-07 17:27:00


아부(阿附)랄까 능력이랄까, 삼성그룹에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일화가 있다.

휴가 때마다 사업구상을 위해 일본을 찾았던 고 이병철 회장은 공항에 도착하면 곧바로 도쿄 시내의 서점으로 직행해 휴가 기간에 읽을 책을 한꺼번에 사곤 했다.

한 일본 지사원이 시간낭비를 질색하는 그룹 총수를 위해 꾀를 냈다. 공항에서 출발해 서점에 도착할 때까지 도로의 신호등 수, 빨간불과 파란불 사이의 간격을 일일이 계산해 신호등에 걸리지 않고 가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그 치밀함에 감탄한 이 회장은 그를 중용했고 이후 일본 지사장들에게 이 신호등 시간표 짜기는 일상 업무가 됐다고 한다.

H그룹에도 만만찮은 이야기가 있다. 사업차 영국을 찾은 그룹 고위인사가 런던에서 오찬에 참석했다가 예정시간을 넘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고위인사의 다음 스케줄은 기차를 타고 지방으로 내려가는 것이었는데 기차 출발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워졌다. 기차역에서 기다리던 직원에게 ‘어떻게든 기차를 잡아두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시간관념이 투철한 영국기차의 출발을 어떻게 지연시킨단 말인가. 그러나 그 직원은 해냈다. 철로에 뛰어들어 이를 만류하는 철도직원들과 숨 가쁜 지그재그 달리기 한판을 벌인 것이었다.

윗사람이 원하는 바를 잘 헤아리고 어떻게 해서든 이를 이뤄내는 것은 출세와 직결되는 ‘능력’이다. 그러나 그런 능력이 때로는 아부로 규정돼 타기(唾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출세한 사람들에 대한 조직 내부의 평가를 들어보면 ‘아랫사람에게 무자비하고 윗사람에겐 무조건 충성하는 형’이라는 얘기가 적지 않다. 직장인들의 술자리에서는 ‘아부’ 잘하는 상사와 동료가 빠지지 않고 안줏거리로 오른다.

모 대기업체의 C부장은 전형적인 아부 스타일이다. 그는 부하직원에게 다양한 아이디어를 수시로 요구한 뒤 자신의 것인 양 포장해 윗선에 제출하는 것으로 악명 높다. 그는 고위층 인사의 자제가 자신의 부서에 배치되자 인사평가에서 다른 부하 직원의 점수를 낮추고 그에게 높은 점수를 준 일이 내부에 알려져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상명하복이 뚜렷한 공직사회에서 아부는 목불인견이다. 서울시의 한 공무원은 “승진연차가 가까워 오면 고과를 맡은 상사의 생일을 챙기는 것은 물론 매일 매일의 컨디션까지 체크한다. 상사가 전날 술을 마셔 피곤한 듯하면 결재 받으러 오는 사람을 가로막아 못 들어가게 하는 경우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속이야 어떻든 겉으로는 지조와 절개의 선비정신이 우리 모두의 표상처럼 돼 있는 한국 사회에서 윗사람에게 표가 나게 굽실거리는, 전형적인 아부는 비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관념적 선비정신과 현실적인 출세지향형 처신간의 괴리가 아부에 대한 극단적 의존과 함께 극단적 비판을 낳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대부분의 조직에서 노골적인 아부는 점차 퇴출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인재 발탁의 문화가 혈연 지연 학연 등 상호의존적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전통형에서 개개인의 자율성과 능력을 중시하는 서구형으로 이동 중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이제는 윗사람에게 잘하려는 노력을 무조건 ‘아부’라고 싸잡아 비판할 일만은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교통신호등 주기를 계산한 삼성 지사원, 기차를 가로막은 H그룹 직원의 사례는 윗사람의 시각에서는 충분히 능력으로 판단될 수 있다는 것이다.

류지성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아부도 능력’이라고 말한다. 물론 여기서 아부란 ‘조직에서 어떤 줄을 타고 가느냐’가 아니라 ‘실세를 잡아 그들의 요구를 파악하는 것’이다.

인재전문 컨설턴트업체 PSI의 이석재 진단평가연구소장도 상사의 성향과 행태를 정확히 파악해 거기에 맞게 대응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능력이라고 말한다.

“어느 조직에서나 유능한 인물들은 대개 멀티플레이어들이다. 그들은 최고경영자(CEO)가 바뀌면 자신이 가진 10개의 카드 중 그 CEO가 원하는 2, 3개만을 보여주고 나머지는 감춘다. 그러다 CEO가 바뀌면 다시 새 CEO가 찾는 카드만을 제시한다. 언제, 어떠한 요구에도 대응할 준비가 돼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짜 인재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