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 70년대 책이 귀하던 시절 줄을 서 책을 구하려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한국의 미래가 밝겠구나 생각했지요. 하지만 요즘 학생들은 책을 멀리하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인천 동구 금곡동 헌책방 거리에서 50년간 ‘집현전’이란 헌책방은 운영하고 있는 오태운(77), 한봉인씨(73) 부부.
평남 순천이 고향인 오씨는 1951년 인천으로 피난 와 부인 한씨를 만난 뒤 53년부터 헌책방을 운영하고 있다.
오씨 부부는 책과 관련된 숱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영어 관련서적을 구하기 힘들었던 시절 학생들의 성화에 못 이겨 미군부대 등을 돌아다니며 헌책을 구하기도 했다. 그러면 책을 사려는 학생들이 책방 앞에 줄을 섰다.
“미군들이 보던 전문서적에서부터 잡지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구해오면 학생들이 앞 다퉈 책을 구입해 밤새 영어공부를 했어요. 그 때 학생들이 요즘보다 명문대에 더 많이 입학한 것도 독서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오씨 부부는 몇 백원이 모자라지만 책값을 깎아 책을 사 읽던 옛 학생들의 배움에 대한 열정을 잊을 수 없다.
지난해 50대 중반의 일본인 남자가 집현전을 찾았다. 이 남자는 일본어가 유창한 오씨와 책에 대해 한참을 얘기했다. 오씨는 이 일본인에게서 깊이 공감하는 말을 들었다.
책방을 둘러보던 일본인은 누렇게 색이 바랜 책갈피를 넘기며 “톨스토이, 니체, 헤밍웨이, 펄벅 등 대문호(大文豪)의 책이 잘 나가냐”고 오씨에게 물었다.
오씨는 “그런 책보다 참고서, 자습서 등이 많이 팔린다”고 답했다.
일본인은 오씨에게 “일본 학생은 한달에 4, 5권의 책을 읽는다”며 “이런 모습은 일본이 다시 경제대국으로 도약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부인 한씨는 1980년 초겨울이 잊혀지지 않는다.
누런 작업복 차림에 손에는 기름때가 낀 20대 초반 남자가 쪼그리고 앉아 책을 골랐다.
한씨가 “누구에게 줄 책을 고르냐”고 물었더니 이 남자는 “첫 월급을 받았는데 동생에게 책을 사주고 싶어 왔다”며 “무슨 책을 골라야 할지 잘 모르다”며 도움을 청했다.
동생을 뒷바라지하는 모습이 안타까워 한씨는 한권 값으로 20여권의 책을 골라줬다.
오씨 부부는 몇 년 전 인천의 섬 지역 어린이들에게 800권의 책을 전달했다.
집현전을 비롯한 헌책방 거리는 6·25 전쟁 직후 폐허가 된 거리에 이동식 리어카 책방이 하나둘 모여들면서 시작됐다. 1960년대 서울 청계천에 이어 전국에서 두번째로 큰 헌책방 거리가 형성됐다.
현재 10여 곳인 헌책방 가게의 주인들은 모두 나이가 60대 이상이어서 헌책방 거리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오씨 부부는 “책을 정리해 헌책들을 낙도 어린이들에게 보내고 싶다”며 “책은 마음을 살찌게 하는 생수와 같다”고 말했다.
차준호기자 run-jun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