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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인준 칼럼]유권자의 충동구매죄

입력 | 2003-12-08 18:22:00


타임지 8일자에 ‘면목 없는 노 대통령’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노무현 후보는 한국정치의 부패 고리와 뇌물 스캔들을 청산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승리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유권자들은 현물을 잘 따져보지 않고 충동구매한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유권자의 선택은 점원에게 홀려 불량 가전제품을 사버린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실제로 대통령을 충동구매했다고 후회해도 반품은 안 된다. 5년간 정부를 맡기기로 용역계약을 했기 때문이다.

▼ 대통령 잘못 뽑았다고 후회한들 ▼

대통령과 국민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다. 대통령은 국민에 대한 종합행정 서비스업체의 최고경영자(CEO)이고, 국민은 서비스 발주자다. 세금은 서비스의 대가이고, 대선 투표는 서비스를 총지휘할 업주를 고르는 행위다. 이 선택을 잘못하면 세금이 아까워도, 속이 끓어도 계약기간이 끝날 때까지 참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선거라는 것이 중요하고, 유권자의 충동구매는 죄가 될 수 있다.

계속 이러면 실패한 대통령이 될 거라고, 서비스의 질을 높이라고 민심과 여론으로 으르고 달랠 수는 있다. 그러나 효과는 대체로 미미하다. 소비자의 권고를 충분히 소화해 낼 자질과 능력이 있다면 애당초 함께 일할 중역들을 제대로 선임하고 고객만족 경영을 했을 것이다.

노 대통령은 이달 하순께 장관 몇 명을 교체하겠다고 한다. 물건다운 물건으로 확 바꾸어 서비스의 질을 쭉 끌어올리고, 결과적으로 ‘대통령 충동구매론’이 틀렸음을 입증해 주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코드는 아무래도 다른 모양이다. 분위기 쇄신용 개각은 없을 것이며, 각료에게 내년 총선 출마를 강권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누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한 개각을 주문했느냐고 묻고 싶다. 분위기가 아니라 흐트러지고 헛도는 국정을 쇄신해 달라, 그러기 위해 고객인 국민 편에서 확실하게 서비스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재들로 정부를 채워 달라고 요망할 뿐이다. 기능이 떨어지는 부품들은 아무리 잘 조립해도 명품이 안 된다.

또 열린우리당 말고 누가 장차관과 청와대 참모들을 총선에 내보내라고 강요했나. 대통령당의 이런 요구는 노 대통령이 반드시 깨겠다고 강조하는 ‘낡은 정치의 기득권 구조’에 기대려는 행태다. 총선용 개각이 아니라, 선거와는 선을 긋고 당면한 경제위기 등에 정면으로 부닥쳐 문제를 풀 수 있는 인물들로 정부 역량을 강화해 달라고 간청하고 싶다.

현 경제팀이 위기에 잘 대처해 왔다는 노 대통령의 평가를 수긍할 수 없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국민을 위해 무얼 왜 쇄신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 어느 원로의 말이 지워지지 않는다. “갈 데까지 가도록 내버려 둬야지, 어떻게 하겠어?”

유권자들은 지난 대선에서 역시 충동구매죄를 저지른 걸까. 내년 총선에서도 충동구매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밥값 좀 하라고 국회를 향해 아무리 외쳐도 의사당의 방음벽은 너무 두껍다. 국회가 해야 할 밥값은 나라 부강하고 국민 행복하도록 우선 좋은 법 제때 만들고 예산 빈틈없이 짜는 일이다. 그런데 자신들의 밥값을 대는 납세자와 유권자에 대한 국회와 각 정당의 서비스는 참으로 엉망이다.

그러고도 여야 정당은 내년 4월 15일의 17대 총선에 목을 걸고, 상대 죽여 내 살기에 몰두하고 있다. 노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이런 상황이 국민에게 그나마 기회일 수 있다. 현재로서는 총선에서의 한 표, 한 표가 유권자의 가장 가깝고 큰 무기다. 잘만 하면 정부와 국회의 품질을 지금보다 높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총선 129일 전, 이번엔 어떡할까 ▼

국민이 정부 여당, 그리고 야당들과 계약을 경신하는 총선까지 129일 남았다. 정말 이번에는 저질 서비스업자들에게 속지 말자. 구린지 비린지 따져보지 않고 또다시 지역 따라, 돈 따라 눈 감고 찍어서는 안 된다. 대통령과 코드가 맞는다고 하루아침에 벼슬자리에 올라 신분을 세탁한 뒤 국회의원 후보로 변신해 “내가 돼야 지역이 산다”고 떠드는 자들도 정신 차리게 해야 한다. 국민을 위해 쥐뿔도 한 일 없이 세금만 축내는 족속은 유권자가 가차 없이 버려야 그 뒤로도 덜 생긴다.

유권자들이 이번 총선에서 충동구매의 회한을 남기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바른 심판을 준비해야 한다. 129일간의 선택이다.

배인준 수석논설위원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