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 전문가를 꿈꾸던 한국의 과학도 전재규씨(27)가 차디찬 남극 바다에서 숨을 거뒀다. 고무보트 ‘조디악’을 타고 실종된 동료 대원을 찾아 나섰다가 당한 참변이었다. 세종과학기지에서 지진을 연구하겠다는 포부는 펼쳐 보지도 못했다.
고무보트 ‘조디악’. 세종기지에서 인근 칠레 프레이 공군기지로 이동하기 위해 보유한 유일한 교통수단이다. 남극에서 사실상 ‘한국대사관’ 역할을 하는 세종기지는 세종 1∼3호로 불리는 고무보트 3척을 갖고 있다. 세종 1, 2호가 실종됐지만 3호는 비상용이어서 쓸 수도, 운전할 사람도 없었다.
이 때문에 수색은 대부분 인근 외국 기지에서 보유한 헬기와 중장비, 구조선박에 의존했다. 결국 구조된 7명 가운데 4명은 러시아 구조대에 의해, 3명은 칠레 공군 헬기에 의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대부분의 시설이 15년 전 그대로입니다. 업그레이드가 안 됐죠. ‘깡통’(컨테이너 숙소) 속에서 비인간적으로 생활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습니다.” 최근 15년 동안 15차례 남극 기지를 다녀온 한국해양연구원 극지연구소 강성호(姜晟鎬) 책임연구원은 세종기지의 상황을 이같이 전했다.
세종기지 사고를 전적으로 장비 탓으로만 돌리기는 힘들 것이다. 혹독한 남극의 기상환경이 큰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지 사정을 아는 사람들일수록 ‘열악한 장비’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실제로 극지(極地) 연구의 필수품인 쇄빙선(碎氷船)이 필요하다는 건의도 꾸준히 제기됐다.
그러나 정부는 늘 예산 부족을 이유로 거부하다 작년에 예산을 일부 책정했다. 남극 기지를 운영하는 18개국 가운데 쇄빙선이 없는 곳은 한국과 폴란드뿐이다. 폴란드는 그나마 비슷한 기능을 하는 내빙선(耐氷船)을 보유하고 있으나 한국은 이마저도 없다.
또 해양연구원이 신청하는 다른 예산도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기 일쑤였다. 세종기지 컨테이너 숙소의 밑동과 기름 탱크는 녹슬어 갔고 대원의 안전은 위협당했다. 쇄빙선은 러시아에서 빌려 쓰고, 헬기는 칠레에 요청하고 있다.
정부는 9일 세종기지의 운송 및 연구장비를 현대화한다는 내용의 대책을 발표했다. 고무보트 사고가 재발되지 않도록 비교적 안전한 쇄빙선을 갖추겠다는 부분도 포함됐다. 익명을 요구한 해양연구원의 한 박사는 “꼭 태풍 피해 대책을 보는 것 같다”며 “태풍으로 한번 큰 피해를 보면 기상청에 슈퍼컴퓨터를 사주는 격”이라고 말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식 행정을 반복할 것인가. 그 과정에서 얼마나 더 많은 희생이 따를지 걱정하는 것이 기자뿐일까.
차지완 경제부 기자 c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