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균돼지’ 복제의 숨은 주인공인 미국 시카고대 의대 김윤범 교수. 김 교수는 40년간 연구해 길러낸 무균 미니돼지를 서울대 황우석 교수팀에 제공해 인간장기 이식용 돼지 탄생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원대연기자
《서울대 수의학과 황우석(黃禹錫) 교수팀이 ‘무균(無菌)돼지’ 생산에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한 재미(在美) 의학자의 ‘고국 사랑’이 있었던 것으로 11일 알려졌다. 비록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지만, 이 무균돼지는 인체에 장기를 이식해도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인간면역유전자(hDAF)를 보유한 것으로 장기이식연구의 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이 세계적 연구 성과의 뒤에는 40년간 밤낮없이 연구해 길러낸 ‘무균 미니돼지’를 연구팀에 기증, 결정적인 여건을 마련해 준 김윤범(金允範·76) 미국 시카고대 의대 교수가 있었다.
황 교수는 “연구 성과의 절반은 김 교수님의 몫”이라며 “복제돼지를 연구하는 세계 모든 학자들이 갈망하는 무균 상태의 미니돼지를 기증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국운(國運)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복제기술은 이미 6년 전부터 개발돼 왔지만 실험의 성공을 위해서는 10년 이상 세대를 이어온 완전 무균 상태의 미니돼지가 필수적이었습니다. 사람의 장기와 크기가 비슷한 장기를 가진 종(種)이고 바이러스가 전혀 없는 상태로 10년 이상 변이가 없이 세대가 이어져야실험이 가능하기 때문이죠.”
서울대 황우석 교수팀이 사람에게 심장, 간 등 장기를 제공할 수 있도록 복제한 ‘무균돼지’의 박제된 모습. 돼지 배에서 밑으로 늘어진 것은 탯줄이다. -연합
무균 상태의 돼지로부터 세포를 추출해 사람의 면역유전자를 주입한 뒤 복제돼지를 생산하면 사람에게 장기를 이식할 수 있는 장기이식용 돼지가 탄생한다. 일반 돼지에게는 미생물이 있어 사람에게 장기를 이식할 수 없다.
하지만 조건을 충족시킬 돼지를 구할 길은 보이지 않았다. 제왕절개로 돼지 태아를 꺼낼 시점까지는 무균 상태지만 외부 공기와 조금만 접촉해도 금세 감염되기 때문.
그러던 중 지난해 12월 26일 서울대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해 사정을 알게 된 김 교수가 황 교수를 찾았다. 김 교수는 “30년간 세대를 이어온 무균 미니돼지를 줄 테니 한국에서 먼저 장기이식용 돼지를 개발하도록 힘써 달라”고 당부했다.
1960년대부터 면역체계 연구를 위해 무균돼지 생산을 추진했던 김 교수는 1973년 무균 미니돼지 생산과 양육에 성공해 세계에서 유일하게 시카고대 의대 연구실에 100여 마리의 미니돼지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
김 교수는 “40여년간 미국에서 생활했지만 마음 한구석에 항상 고국을 위해 뭔가 하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며 “평생의 연구성과가 고국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정말 기쁜 일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김 교수는 “만일 실력이 없었다면 아무리 고국이라도 결코 돼지를 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그는 돼지를 기증하기 전 고령에도 불구하고 황 교수팀의 실험실과 농장을 찾아다니며 연구 현황을 검토했다.
“실험실을 둘러보면서 이 연구가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의학 수의학 자연과학 등 각 분야의 학자들이 이토록 열정적으로 협력해 일을 추진하는 경우가 세계적으로 드물었기 때문입니다.”
김 교수는 이후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으며 연구결과를 지켜봤다. 발표가 있던 10일에는 직접 고국을 찾아와 함께 기쁨을 나눴다.
“40여년을 연구에 몰두해 왔지만 아직도 배울 게 많습니다. 후학들에게 항상 ‘실패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니 좌절하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연구(Research)란 이미 있는 진리를 다시(re) 찾는(search)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김 교수는 “이 연구의 성공은 곧 대한민국의 자랑”이라며 “무균돼지가 장기를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쓰일 수 있는 날이 곧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지원기자 podrag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