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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김순덕칼럼]대통령과 김치

입력 | 2003-12-12 18:24:00


청와대 김장 얘기가 아니다. 여기서 김치는 국제 정치경제학 용어로 새롭게 등장한 메타포(metaphor·은유)다.
미국 시카고대 경영대학원 마빈 조니스 교수 등은 새 저서 ‘김치가 중요하다(The Kimch Matters)’에서 글로벌 시대엔 김치라는 독특한 지역적 역동성이 그 나라에, 나아가 지구촌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그 생생한 예가 마이크로소프트의 ‘아래아한글 습격사건’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1998년 아래아한글 생산 중지 조건으로 경영난에 빠진 한글과컴퓨터에 투자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뜻밖에 격렬한 국민적 저항이 일어났고 마이크로소프트의 계획은 백지화됐다. 세계적 거대기업도 한글과 아래아한글이 한국인에겐 민족적 자부심의 상징임을 몰랐던 탓이다.
▼국민감정은 한국적 역동성 ▼
제목엔 거창하게 김치가 등장하지만 이 책엔 한국 상황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지난해 오늘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미군 장갑차 여중생 치사사건’을 전화로 사과했고, 북한 핵 사태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후보가 “당선되면 김정일과 부시 대통령을 만나 포괄적 해결책을 찾겠다”고 한 것이 오늘의 한국에,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분석도 없다.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김치는 분명히 작용하고 있다. 당시 대통령선거를 움직였고 현재 한국정치를 이끌고 있는 김치 중 하나는 마이크로소프트를 격퇴한 국민감정이다.
헌법 위에 국민감정법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말해 주듯 우리의 국민감정은 유별나다. 예부터 춤과 노래를 즐긴 동이족 후예답게 “기분이닷!” 선언은 어떤 논리도 잠재울 만큼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국민감정 중에서도 맨 앞자리에 있는 것이 민족적 자부심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루시안 파이가 “한국의 힘은 특정한 제도보다 민족적 자부심과 연대감에 있다”고 간파했을 정도다. 월드컵 축구경기 때 자랑스럽게 ‘대애한민국’을 외쳤던 흥분, 여기에 꽃다운 소녀의 죽음이 불 지른 반미 감정, 그리고 “미국에 굽실굽실 않겠다”며 북한을 같은 민족으로 껴안은 노 후보의 이미지는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미국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대한민국으로 변화시킬 대통령이라고 국민감정이 선택한 인물이 노무현이었다.
1년이 지난 지금, 현실은 참담하다. 대통령 주변부터 말단 경찰까지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나라에 민족적 자부심은 없다. 나오느니 욕뿐인 현 상황이 죄 대통령 때문이라고 한다면 ‘악의에 찬 비판’이 될 터이다. 그러나 잘되든 못되든 모든 책임은 리더에게 있다. 그게 리더의 숙명이다.
사실 리더를 향한 우리 국민감정은 지극히 이중적이다. 중국인은 가부장적인 강한 리더를, 일본인은 자상한 아버지 같은 리더를 원한다는데 중간에 자리 잡은 우리 국민은 욕심 사납게 강하고도 자상한 대통령을 바란다. 그러니 후보 시절 외쳤던 강력한 개혁을 밀고가지도 못하면서 불법시위엔 자상함 넘치는 노 대통령은 어느 쪽에서도 박수 받지 못하게 됐다.
더구나 국민감정만 갖고는 어쩌지 못하는 게 있다. 바로 경제다. 설령 부패가 심해도, 독재를 해도 돈이 돌고 백성이 잘살면 위기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조니스 교수는 지적했다. 석유 부국과 싱가포르가 그 예다. 미국 중국은 물론 브라질 경제까지 상승세를 타는데 성장은커녕 재벌개혁도, 분배도 안 되고 있는 우리 현실은 분할 정도다. 성장이 막혔으니 분배가 될 리 있나.
▼1년 전 각오로 돌아가라 ▼
그래도 잃어버린 1년에 절망하는 건 우리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어디 하나 안 썩은 구석이 없다고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나라를 뒤엎을 수는 없다. 위기 때마다 끓어오르는 게 우리의 김치, 국민감정 아니던가.
가장 고맙기로는 노 대통령이 1년 전 이맘때를 되돌아보고 당선 당시 그 벅찬 초심으로 돌아가는 거다. 검은돈 안 받겠다(2002년 12월 1일)는 다짐이야 이미 어겼으니 도리 없지만 내각을 능력 최우선으로 짜겠다(3일)는 것만 기억해 줘도 당장 심기일전 계기가 될 것 같다.
시곗바늘을 되돌릴 수는 없어도 마음을 고쳐먹는 건 가능하다. 노 대통령이 재신임 요구 같은 벼랑 끝 전술을 버리고, 벼랑에서 뛰어내리는 심정으로 부패 끊기와 경제 살리기에 나선다면 2003년 말의 위기는 정권의, 민족 자부심의 역전 기회로 기록될 수도 있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