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산한 연말을 맞아 무언가 따뜻한 말을 하고 싶었다. 한마디 희망의 메시지를 남기고 싶었다. 대한민국이 가라앉는다고 다들 아우성이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을 힘주어 밝히고 싶었다. 그래서 며칠을 고민했다. 선철(先哲)들의 금언(金言)도 이리저리 뒤져 보았다. 그런 와중에 ‘대쪽’ 이회창씨가 ‘감옥행 불사’를 외쳤다. ‘바보’ 노무현 대통령은 ‘10분의 1 도박판’을 벌이고 있다. ‘초 친다’는 것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가.
▼12년째 ‘플루트 자선 콘서트’에 감동 ▼
플루트 연주자 배재영 선생은 달랐다. 그는 지난 일요일 ‘사랑의 플루트 콘서트’를 했다. 앓아누워 있으려니 하고 연락해 봤더니 웬걸, ‘대한민국의 아줌마는 몸살 걸릴 권리도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배 선생은 60명이나 되는 단원을 이끌고 두 달 동안 꼬박 연습을 했다. 그리고 그날 재활원 요양원 보육원 등 각종 복지시설에서 모처럼 서울 나들이를 한 400명의 손님들에게 아름다운 음률을 선사했다. 객석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그렇게 모은 돈 얼마를 장애아들을 위한 특수학교 건립기금으로 보낸다. 벌써 12년째다.
궁금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한마음이 될 수 있는지, 경비는 어떻게 충당했는지, 그리고 ‘수지’는 맞았는지 속사정을 다 캐물어 보았다. 물론 자원봉사였다. 두 달 동안 15번 정도 모여 연습했다. 배가 출출하면 단원들이 돌아가며 김밥이나 햄버거를 ‘쏘았다.’ 그것도 모자라 십시일반 갹출도 했다. 음악회 전날에는 온 단원이 함께 모여 밤 12시까지 아이들에게 보낼 선물을 쌌다.
배 선생은 30대 초반에 이 일을 처음 시작했다. 그때 고등학생이던 단원이 어느새 중견 음악인이 되어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단다. 한번 시작하면 도중에 그만두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하니 놀라울 뿐이다. 이 작은 음악회가 이루어지기까지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도왔다고 한다. 연습장을 빌려주는 분에서부터 보이지 않게 힘을 실어 주는 분 등 많은 정성이 모여 사랑의 화음이 나온 것이다.
객석에서 손 흔들어 주는 아이들을 보노라면 그저 행복할 뿐이라는 배 선생에게 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받은 것이 너무 많단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음악을 한다는 것은 남다른 혜택이 아닐 수 없다. 외국 유학까지 하고 돌아오니 마음의 빚이 너무 컸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재능이라도 사회에 환원하고 싶었다. 내가 가진 것 나눌 수 있는 대로 나누자, 이런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단다. 누가 앞장을 서 주면 따라가리라 하다가 마침내 자신이 앞장서고 말았다. 흰머리 날리며 후배들 뒤에서 플루트를 연주할 수 있게 될 그날을 기다린단다.
대쪽과 바보는 모르기는 해도 우리 시대 ‘최후의 우상’일 것이다. 이회창씨가 ‘법대로’를 외쳤을 때 온 국민이 가슴을 열었다. 그런 그가 법을 농락했다. 그러고도 큰소리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우직한 개혁’을 내걸었을 때 수많은 사람이 환호했다. 그런 그가 영악한 정치게임을 벌이고 있다. 벌써 ‘정치 10단’이라는 평가를 받으니 앞으로 그와 함께 할 4년이 무섭기까지 하다.
▼‘영악한 정치게임’ 실망스럽지만…▼
물론 긴가민가했다. 정말 그럴 것인지 두고 보자는 심산이었다. 그러면서도 대쪽과 바보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저버리지는 못했다. 끝내 ‘후세인의 가면’이 벗겨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국민의 가슴은 처참하기까지 하다. 이회창씨가 감옥에 간들, 노 대통령이 또 무슨 말을 한들 한마디로 관심 밖이다. 사랑이 식으면 이럴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그러기에는 우리 삶이 너무 절박하다. 이제까지 쌓아 온 공도 아깝다. 어떻게 건설한 대한민국인가. 어떻게 키워 온 민주주의인가. 그래서 고민하는 것이다.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옳은가.
그러나 세상에 저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의 플루트 콘서트’는 그 작은 예에 지나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고 있다. 사랑과 진실의 새순이 돋아나게 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 대신 해 주길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앞장서는 사람들이 있다. 대한민국에 희망이 없다는 말, 함부로 하지 말라.
서병훈 숭실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