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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이 잠잘 때 시를 쓴다” 통영에서 양봉하는 시인 이종만

입력 | 2003-12-17 11:32:00


시인 이종만씨(54)는 벌을 기른다. 29세 때 벌통 4개를 들고 꽃을 찾아다니기 시작한 길. 시인은 그 길을 20년 훌쩍 넘게 걷고 있다.

5월 내내 벌통 300개와 함께 아카시아 꽃을 따라 다니며 매일매일 채밀(採蜜)하고, 6~8월 강원 원주에서 로얄제리를 거둔다. 이어 9,10월 벌의 월동 준비를 하고 11월부터 다음해 1월까진 동면을 위해 벌을 재운다. 2~4월에는 잠들었던 벌을 깨우고, 벌통에 벌을 계속 보충해준다.

그는 벌들이 잠을 자는 동안만 시를 쓴다. 봄 여름 가을을 지나며 머리와 가슴 속에 차곡차곡 쟁여놓은 것들을 겨울에 시로 풀어낸다.

그의 고향은 경남 통영시 사량도. 삼천포 등 고향 인근을 떠돌다 진주시에 자리잡은 지 올해로 15년째다. 벌들은 따뜻한 통영에서 올 겨울을 난다. 진주에서 시인을 만나 통영으로 가는 고속버스를 함께 탔다. 요즘 시인은 벌통을 둘러보기 위해 일주일에 서너 번씩 통영에 간다.

버스는 겹겹이 산이 늘어선 길을 따라 달려갔다. 시인은 어린시절, 가난과 외로움을 지독하게 겪어야 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세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홀어머니는 지게를 지고 농사일을 하며, 5남매를 키웠다. 8년 전 아버지 곁으로 간 어머니는 지금도 이씨의 꿈속에서 늘 일하는 모습으로만 나타나신다.

학창시절에는 돈이 없어 교과서를 살 수 없었다. 게다가 몸까지 병약해 우울증을 앓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가장 재밌는 일은 동시쓰기. 초등학교 3학년 때 동시를 처음 가르쳐줬던 선생님의 이름을 이씨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가 삼천포까지 두 시간 뱃길을 오가며 중학교를 마친 것을 끝으로 변변한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17세 소년은 동네에서 소소한 일거리를 거들어주고 받은 돈을 모아 처음으로 '안네의 일기'를 샀다. 서점에서 3시간이 넘게 고르고 또 고른 그 책을 이씨는 지금도 애지중지한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 잠겨 있던 어느 날, 동네 어른이 벌을 키우는 모습을 보았다. 이씨는 그 일이 '낭만적'으로 보였다고 말했다. 무작정 벌통 4개를 사서 그 어른을 따라 나섰다. 그렇게 사량도를 떠났다.

벌 키우는 일을 배우면서 하나 둘씩 벌통을 늘려갔고, 꽃을 따라 객지를 떠도는 생활이 이어졌다. '벌 이동은 정해진 날이 없다/ 점심을 먹다 꽃 피웠다는 소식에/ 첫 별 머리에 이고 소리소문 없이/ 어둠 속으로 스미듯 간다'('양봉일지 1' 중)

아주 작은 곤충을 갓난 아기처럼 돌보다 보니 사소한 것들을 새롭게 바라보는 눈이 생겼고, 아카시아 꿀을 채밀하는 동안 적막한 곳에서 4~7일간 머물며 노숙하다보니 자연의 숨소리가 들렸다. 책보다 자연을 읽는 시간이 더없이 행복했다.

"자기 마음을 파고들어서가 아이라 (자기 어깨를 톡톡 치며) 여기서부터 시를 깨친다는 걸 알게 됐다 아입니꺼. 살아있는 것들과 어깨를 부딪치는 바로 거기에 시가 펄떡펄떡 살아있는 기지예."

홀로 습작을 거듭하다 40대가 넘어서야 문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영자, 정진규 시인의 추천으로 92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했다. 문단에 발을 들인 지 10년이 지났지만, 이씨는 아직 자신의 이름을 붙인 시집이 없다.

차로 1시간 반을 꼬박 달린 끝에 통영에 도착했다. 잠들어 있는 벌통을 챙기다 말고 그가 툭 한 마디를 던졌다.

"바다 위에 둥그렇게 뜬 보름달 본 적 있어예. 평생 사랑하고 싶은 여자보다 더 황홀합니더. 자연이 주는 황홀경을 맛보지 못했더라면 지는 시를 못 썼을 낍니더."

통영=조이영기자 l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