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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山別曲]벌치는 시인 이종만

입력 | 2003-12-17 18:21:00

경남 진주시에 살고 있는 시인 이종만씨는 겨울동안 벌들이 잘 자고 있는지 살피러 자주 통영에 온다. 겨울 오후, 통영 앞바다는 등 뒤에서 넘실대고, 이따금 잠에서 깬 벌 한두 마리가 윙윙거리며 잠투정을 부린다. -통영=조이영기자


시인 이종만씨(54)는 벌을 친다. 29세 때 벌통 4개를 들고 꽃을 찾아다니기 시작해 그 길을 20년 훌쩍 넘게 걸어 왔다.

5월 내내 벌통 300개와 함께 아카시아 꽃을 따라 전국을 다니며 매일 채밀(採蜜)하고, 6∼8월 강원 원주에 마련한 작업실에서 로열젤리를 거둔다. 이어 9, 10월 벌의 월동준비를 하고 11월부터 다음해 1월까진 벌을 동면(冬眠)시킨다. 2∼4월 잠들었던 벌을 깨우고, 벌통에 벌을 계속 보충해 준다.

그는 벌들이 잠자는 겨울 동안에만 시를 쓴다. 봄 여름 가을을 지나며 머리와 가슴 속에 차곡차곡 쟁여 놓은 것들을 겨울에 시로 풀어내는 것이다. 그의 고향은 경남 통영시 사량도. 삼천포 등 고향 인근을 떠돌다 진주시에 자리 잡은 지 올해로 15년째다. 벌들은 따뜻한 통영에서 겨울을 난다. 진주에서 시인을 만나 통영으로 가는 고속버스를 함께 탔다. 요즘 그는 벌통을 둘러보기 위해 일주일에 서너 번씩 통영에 간다.

버스는 겹겹이 산이 늘어선 길을 따라 달려갔다. 시인은 어린시절, 가난과 외로움을 지독하게 겪어야 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세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홀어머니는 지게를 지고 농사일을 하며, 5남매를 키웠다. 8년 전 아버지 곁으로 간 어머니는 지금도 이씨의 꿈속에서 늘 일하는 모습으로만 나타나신다.

사량도에서 삼천포까지 두 시간 뱃길을 오가며 중학교를 마친 것을 끝으로 그는 변변한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17세 소년은 동네에서 소소한 일거리를 거들어주고 받은 돈을 모아 처음으로 ‘안네의 일기’를 샀다. 서점에서 세 시간 넘게 고르고 또 고른 그 책을 이씨는 지금도 애지중지한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 잠겨 있던 어느 날, 동네 어른이 벌을 키우는 모습을 보았다. 이씨는 그 일이 ‘낭만적’으로 보였다고 말했다. 무작정 벌통 4개를 사서 그 어른을 따라나섰다. 그렇게 사량도를 떠났다.

벌 치는 일을 배우면서 하나 둘 벌통을 늘려 갔고, 꽃을 따라 객지를 떠도는 생활이 이어졌다. 아주 작은 곤충을 갓난아기처럼 돌보다 사소한 것들을 새롭게 바라보는 눈이 생겼다. 아카시아 꿀을 채밀하는 동안 적막한 곳에서 4∼7일간 머물며 노숙하다 보니 자연의 숨소리가 들렸다. 책보다 자연을 읽는 시간이 더없이 행복했다.

“(자기 어깨를 톡톡 치며) 여기서부터 시를 깨친다는 걸 알게 됐다 아입니꺼. 살아 있는 것들과 어깨를 부딪치는 바로 거기에 시가 펄떡펄떡 살아있는 거지예.”

홀로 습작을 거듭하다 40대가 넘어서야 문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영자, 정진규 시인의 추천으로 92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했다. 문단에 발을 들인 지 10년이 지났지만, 그에겐 아직 자신의 이름을 붙인 시집이 없다.

차로 한 시간 반을 꼬박 달린 끝에 통영에 도착했다. 벌통을 챙기다 말고 그가 툭 한마디 던졌다.

“바다 위에 둥그렇게 뜬 보름달을 본 적이 있지예. 평생 사랑하고 싶은 여자보다 훨씬 더 황홀하다 아입니꺼. 자연이 주는 황홀경을 맛보지 못했다면 지는 시를 못 썼을 낍니더.”

통영=조이영기자 l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