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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학회 향락문화 학술]性의 상품화 조선후기 본격진행

입력 | 2003-12-17 18:21:00

신윤복의 야연도(野宴圖). 조선후기 이후 유교문화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확산된 성적 향락 문화가 기생, 첩, 창부, 여급 등 여성의 성적 희생을 어떤 방식으로 재편하고 심화시켜왔는지 논의하는 학술대회가 열린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1896∼1906년 조사 작성된 ‘한성부 호적대장’을 검토한 결과 19세기 말∼20세기 초 서울지역 공직자의 5분의 1이 첩을 소유하고 있었다. 또 첩 소유자의 83.9%가 양반 출신이었다.

조은 교수(동국대·사회학)와 조성윤 교수(제주대·사회학)는 20일 오후 2시 서울대 사회과학대학 4층 상백헌에서 열리는 한국사회사학회(회장 안호용·고려대 교수) 학술회의에서 발표할 공동논문 ‘한말 첩의 존재양식’에서 1896∼1906년 ‘한성부 호적대장’을 토대로 한성 지역의 첩 현황을 밝혔다. 이 자료에 따르면 대상 지역 1만1364호 중 첩이 있는 집은 633호로 전체의 5.6%. 이 중 618호가 성 안에 있었고 성밖 지역은 9호에 불과했다. 6호는 확인되지 않았다.

당시 관직 보유자들은 18.6%가 첩을 두어 공직자 5명 중 한명꼴로 ‘축첩(蓄妾)’을 유지했다. 반면 중인 출신 중 첩을 둔 집은 11.9%, 전체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양인(良人) 출신의 경우는 1% 이하인 41호만이 첩을 두고 있었다.

두 연구자는 “결국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된 후에도 신분과 직책, 경제력에 따라 축첩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 학술회의에서는 ‘타자의 몸과 향락: 조선후기와 식민지시기의 기생·첩·창부·여급’을 주제로 조선후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성적(性的) 향락문화의 변천을 조명한다. 또 유교적 예악(禮樂) 문화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여성들을 희생양으로 한 향락문화가 어떤 방식으로 점차 심화돼 왔는가도 논의한다.

신경숙 교수(한성대·국문학)는 미리 제출한 발표문 ‘조선 후기 여악(女樂)과 섹슈얼리티’에서 “조선시대에는 일반 기녀들뿐 아니라 국가의 공식 의례와 각종 연회에서 음악과 가무를 담당했던 여악(女樂)이나 관기(官妓)도 지배층을 위한 성적 봉사 임무에서 자유롭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신 교수는 특히 “조선후기 여악이 관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민간 예술의 영역으로 편입되면서 여악의 경영자로 나선 기부(妓夫), 남성가객(歌客), 좌상객(座上客) 등 이른바 ‘여악 매니저’들에 의해 여악이나 관기의 성적 도구화가 더 심해지게 됐다”고 주장한다.

권희영 교수(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사)는 발표문 ‘호기심 어린 타자: 20세기 초 한국에서의 매춘부 검진’에서 1904년 인천에서 처음 시작된 매춘부들의 위생검진에 주목했다. 권 교수는 “정치가, 군인, 사회운동가 등이 모두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시대적 목표로 설정함으로써 매춘부 치료가 하나의 시대적 요청으로 여겨지게 됐다”며 “이 과정에서 당시 ‘매춘부’는 남성의 불안감과 죄책감까지 함께 떠안은 채 가차 없이 그 명예를 짓밟혔다”고 주장한다. 02-3290-2076

김형찬기자 kh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