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4대 그룹의 재무팀과 법무팀원들은 개인적인 송년회 약속을 대부분 취소했다.
SK그룹의 한 관계자는 “새해 벽두부터 그룹의 운명을 좌우할 현안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어 대책 마련에 바쁘다”며 “가족과 연말을 즐길 짬이 나지 않는다”고 하소연할 정도.
전경련 이규황 전무는 “2004년에도 대기업은 정치권, 자본시장, 경쟁시장에서 밀려올 3각 파도 때문에 뉴스의 중심에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대선자금 후(後)폭풍=우선 삼성 LG SK 현대 등 4대 그룹은 대선자금 수사 후 불어올 후폭풍에 시달려야 한다. 수사가 마무리된 뒤 정치권의 합의를 거쳐 대통령이 사면을 한다고 해도 이는 형사적인 책임에 국한된 것. 시민단체나 소액주주가 제기할 민사소송은 피하기 어렵다.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김상조 소장은 “2004년 재벌들은 과거와 같은 형태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라며 “2005년부터 본격화할 집단소송 등에 대해 기업이나 소액주주, 시민단체가 본격적으로 대비하는 시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선자금 수사로 악화된 대기업에 대한 국민인식과 내년 4월 총선이 맞물려 기업지배구조 관련 이슈도 다시 떠오를 것으로 보인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이미 시장개혁 로드맵을 작성, 국회에 입법안을 제출한 상태. 공정위는 대주주의 지분과 권한간에 괴리가 큰 기업의 경우 출자총액제한 규정을 풀지 않고 각 대기업 그룹이 지주회사나 브랜드만 공유한 느슨한 연계회사로 변화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그러나 대기업들은 “한국 경제의 최대 현안이 투자 부족인데 기업지배구조 문제 때문에 투자를 막는 것은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잘못을 범할 가능성이 높다”며 반발하고 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의 아들 이재용 상무의 에버랜드 전환사채(CB) 인수와 관련된 검찰의 수사도 관심을 끄는 사안.
만약 검찰과 사법부가 이 상무의 CB 인수를 위법으로 판단할 경우 한국의 간판기업인 삼성그룹의 경영권 상속 시나리오에 변수가 생길 수 있다.
비슷한 방법으로 경영권을 승계 중인 재벌들도 영향을 받는다. 효성 현대산업개발 동양메이저 등은 이런 분위기를 감지하고 저가에 대주주 지분을 높일 수 있는 신주인수권부사채(BW)의 신주 인수 권리를 최근 포기했다.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노출된 재벌=적대적 M&A도 2004년의 중요 이슈. 이미 10대 그룹의 외국인 지분은 40%를 넘어섰다. SK는 소버린 자산운용과 그룹 경영권을 놓고 3월부터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고 있다.
양측의 싸움이 치열해지고 토종 사모펀드까지 출현, 적대적 M&A가 이어지면 외환위기 이후 앞뒤 가리지 않고 받아들인 ‘주주 자본주의’의 논리를 한 번쯤 되돌아보자는 목소리가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적대적 M&A가 과연 주주 이익과 기업경쟁력에 도움을 주는지’ ‘외국인들의 금융회사 및 국내 주요 산업 잠식을 어느 선까지 용인할 것인지’ 등이 새로 제기될 이슈.
투자 부족과 맞물려 갈수록 취약해져가는 대기업의 경쟁력도 피해갈 수 없는 문제다. 금융업 포기, 하나로 통신 인수 실패 등의 상처를 입은 LG, 경영권 싸움을 하면서 동시에 그룹 구조조정을 진행해야 하는 SK, 외환위기 이후 이렇다할 성장 동력을 못 찾고 있는 중견그룹들….
나름대로 선전하고 있는 삼성 현대차 포스코도 1년 앞을 자신할 수 없는 치열한 경쟁을 하기는 마찬가지다. 1년 뒤에도 한국의 대기업들이 건재할 것이라고 누구도 자신있게 말할 수 없는 것이 글로벌 경쟁 사회의 현실.
한국경제연구원 이인권 박사는 “대기업 체제가 시대변화에 맞게 변화해야 하는 것은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물줄기”라고 전제하고 “다만 재벌개혁과 관련된 모든 논의는 ‘국가경쟁력 강화’라는 대승적인 목표 아래서 이뤄져야지 정치적인 이유나 특정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휘둘려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이병기기자 eye@donga.com
이나연기자 laros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