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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홍순영/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입력 | 2003-12-18 18:39:00


2000년 6월 15일 남북공동선언 이후 남북간에 대화 협력이 이루어지면서 ‘우리끼리 민족끼리’란 슬로건이 등장했다. 민족이 단합하면 안 될 것이 없으니 남북협력을 증진하고 통일도 이룩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자는 감상이다. 이러한 감상은 급기야 북한 핵개발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동정’하면서 민족끼리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통일이 되면 핵무기도 민족 전체의 소유가 되지 않겠는가라는 민족지상주의의 환상에 이르렀다. 이런 맥락에서 한미 맹방 관계를 평화와 통일에 대한 장애물로 보고 미군의 철수가 민족자존을 위해 바람직하다는 환상도 생겨났다.

▼경제파트너-이데올로기의 모델 ▼

우리의 햇볕정책은 남북 평화공존을 위한 것이었다.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시장경제와 국가명령경제의 통합은 불가능하므로 평화를 위해 다른 체제를 서로 용납하면서 공존하자는 것이 평화공존이다. 이는 미국 소련의 공존, 동서 독일의 공존을 모델로 삼은 실용주의적 제안이었고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국제사회의 지지도 받았다. 그러나 북한은 핵무기 개발 계획으로 평화공존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미국에 대한 비판이 커졌다. 올 3월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에는 미국을 ‘평화의 적’으로 매도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그런 비판은 미국 안에서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게릴라 세력은 미국을 이라크의 적이 아니라 이슬람의 적으로 돌리는 데 일정 부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 또한 일방주의의 한계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 제거라는 전쟁의 기본 동기에는 후회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 이라크에서 곤경을 겪고 있다고 해서 미국이 최강대국으로서 세계 안보질서를 유지한다는 역할을 갑자기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은 후세인 생포와 관계없이 이라크에서 민주 자립정부를 세우는 노력을 일정 기간 계속할 것이다.

그런 미국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미국은 한국의 군사정부를 부추기고 민주화를 억제한 나라인가? 한국 경제를 종속경제로 만들고 시장개방을 강요하는 나라인가?

아니다. 역대 미국 정부는 북한의 도발로부터 한국의 자유를 지킨다는 안보의 큰 틀 안에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우방이 할 수 있는 ‘간섭’과 ‘압력’을 행사해 왔다. 미국 시장을 개방해 우리의 수출 입국을 가능케 해 주는 한편 세계 자유무역질서에의 동참을 위해 우리의 시장개방도 요구했다.

미국은 우리에게 자유민주주의의 모델이었다. 우리는 미국의 기업가 정신, 경영 능력, 과학기술력에서 오늘의 시장경제를 배웠다. 미국은 우리의 최대 경제 파트너이며 미국 시장은 여전히 중요하다. 미국의 가치관과 역할은 통일한국 시대에 더욱 중요할 것이다. 통일한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가치관을 기반으로 할 것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동북아 및 세계경제의 중요한 일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국이 군사력의 우위뿐 아니라 높은 도덕성을 겸비해 초강대국으로서 지도력을 발휘해 주기를 기대한다. 그것이 우리의 국가이익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지금 미국은 세계문명의 첨단에서 현대문명의 방향과 공과(功過)를 실험하는 선진 국가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독립전쟁, 남북전쟁(시민전쟁), 두 번의 세계대전, 소련과의 냉전, 그리고 흑백 갈등 등 많은 시련을 겪었다. 그 근저에는 건국 이후 줄곧 지켜 온 자유정신이라는 국가이념이 있었다. 미국은 자유정신에 입각한 자유토론을 통해 끊임없는 자기혁신(self-renewal)을 해 온 것이다. 미국인들은 자유민주주의가 완성된 기성품이 아니라 항상 가꾸고, 때로는 자기를 희생하면서 지켜야 할 이데올로기라고 믿고 있다. 바로 그 점에서 미국은 한국의 모델이 되고 있는 것이다.

▼공동이익의 범위 넓혀가야 ▼

우리는 한미관계의 피해자가 아니라 수혜자다. 한미관계는 이기고 지는, 자존심을 빼앗고 빼앗기는 경쟁관계가 아니다. 우리가 미국과 동반자 관계를 강화하는 길은 공동이익의 범위를 넓혀 가는 데 있다. 양국간에 있을 수 있는 견해차는 동반자 관계의 근저에 있는 자유정신의 이데올로기를 재확인하면서 극복할 수 있다. 지금은 한미 맹방 관계의 의미를 재확인해야 할 중요한 시기다. 이번에 정부가 내놓은 이라크 파병 결정은 전향적이며 온당한 것이었다. 한미간의 상호투자협정(BIP)도 조기에 체결되어야 한다.

홍순영 객원논설위원 전 외교통상부·통일부 장관syhongsenior@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