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싼 노동력을 찾아 해외로 진출한 한국 기업이 현지 근로자에게 임금도 제대로 주지 않은 채 몰래 보따리를 싸 도주하는 사례가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노총은 노동부 외교통상부 국제노동재단 한국경영자총협회와 함께 노사정 공동 노무관리지원반을 구성, 2∼7일 스리랑카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의 실태를 현지 조사해 19일 그 결과를 공개했다.
▼해외서…국내서…'어글리 코리안'▼
-기지촌 외국인여성 '수난'
스리랑카는 한때 한국 기업의 투자가 집중돼 140여개 기업이 진출하기도 했다. 경영환경이 나빠져 지금은 70여개 기업만 공장을 가동하고 있지만 아직 현지인 고용이나 투자금액 면에서 세계 최상위권이다.
그러나 2∼3년 전부터 임금도 주지 않고 철수하는 업체가 하나 둘 생기면서 남아있는 기업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스리랑카 최대 의류업체였던 K사가 무단 철수해 외교 문제로 비화할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
한국노총의 보고서에 따르면 K사는 13년 전 스리랑카에 진출해 현지인 4000여명을 고용했던 대표적인 한국 기업이었지만 경영상태가 나빠지자 9월 최고경영자가 밤중에 도주했다.
이 회사는 거액의 임금을 체불하고 640억루피(약 8000억원)에 이르는 사회보장 분담금을 내지 않았으며 현지 은행에서 빌린 5000만달러도 갚지 않았다.
K사에 고용돼 일하던 스리랑카 근로자들은 “번 돈을 한국의 모(母)기업으로 빼돌린 게 아니냐”며 한국인 관리직원들을 억류한 채 한국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에 앞서 1월엔 장난감 생산업체인 C사의 한국인 임직원들이 밀린 임금을 갚지 않고 야반도주했다. 그러나 이 회사의 실질적인 소유주는 서울 강남지역에 상당한 규모의 부동산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인수해 운영하던 화학섬유업체 L사도 적자가 누적되자 2001년 11월 한국인 관리자들이 줄행랑을 쳤다.
한국노총 조기두(曺箕斗) 부장은 “현지의 오랜 내전(內戰)에다 중국 베트남 등 경쟁국의 약진, 강한 노조 때문에 한국 기업들이 고전했지만 무책임하게 떠난 데 대해서는 얼굴을 들 수 없었다”고 말했다.
노동부 강영복(姜英福) 사무관도 “현지인들이 한국 기업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바라봐 남아 있는 기업들이 은행 대출을 받기도 쉽지 않다”며 “악덕 기업주들을 제재할 방법도 없어 답답하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강 사무관은 “중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태국 방글라데시 및 중남미 국가들도 돌아봤지만 스리랑카만큼 여건이 좋지 않은 나라는 없었다”고 말했다.
정경준기자 news9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