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변화하고 있다. 그리고 전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혼돈 속에서 퇴보하고 있다. 왜 그러한가. 시대의 진운(進運)을 읽고, 이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국가경영의 리더십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은 지난 세기의 전반에 남의 나라 식민지로 있었다. 그리고 민족상잔의 6·25전쟁도 경험했다. 산업화를 해야겠는데 자본이 없어 서독에 파견된 광원과 간호사의 월급을 담보로 외국 돈을 빌려야 했다. 현지를 방문했던 당시의 대통령이 고생하는 이역의 동포들 모습과 가난한 조국의 현실에 가슴이 시려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코드 고집…통합의 정치 발목잡아 ▼
이런 피와 땀과 눈물 위에서 우리는 비로소 20세기 후반에 세계 3류국가에서 2류국가로 올라설 수 있었다. 자족하기에는 아직도 ‘따라잡기’의 과제가 엄연하다. 그러나 이 절박한 시점에 우리는 전진이 아닌 후퇴를 거듭하고 있다.
1년 전 노무현 대통령은 ‘새 정치’를 화두로 내세워 당선됐다. 그리고 취임사에서 개혁과 통합의 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을 약속했다.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를 일소하고 생산적인 정치를 펴는 것이 개혁이며, 세계역사의 발전에 조응해 민족의 역량을 하나로 아우르는 것이 통합이다. 그런데 왜 노 대통령 주변 인사들은 19세기의 ‘낡은 진보’를 지금 한국에서 실현하려 드는가. 시대에 뒤떨어진 코드를 고집하는 소수 집단이 다수를 배제하는 지금의 정치가 어떻게 통합의 정치란 말인가. 뛰어야 할 대한민국의 발목을 잡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노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점점 떨어져 국민 다수가 그를 지지하지 않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 그에게서 비전과 철학과 원칙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혼란과 분열과 불안 속에서 방황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노 대통령은 지금 이 순간에도 “시민혁명은 계속돼야 한다”고 말한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1년이 된 지금까지 ‘그들’은 승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민심을 제대로 읽고 있는 국가지도자의 말이 아니다. 국민 앞에 겸허한 자세도 아니다.
아직도 많은 국민은 노 대통령이 대통령 수업기간을 빨리 마감해 진지한 자세로 국정에 임해줬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원칙에 입각한 국정을 이끌어 세계의 변화에 부응하는 나라로 만들어줬으면 하고 소망한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라도 노 대통령은 국정운영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우리 사회가 낡은 담론에 끌려 다니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미래에 희망을 줄 수 있는 정치를 해야 한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 회장은 21세기의 첫 10년을 속도의 시대라고 했다. 특히 생각이 빠른 속도로 변해야만 시대에 적응할 수 있다고 했다.이제 모든 것이 달라지고 있다. 생산하는 방식도, 소비하는 행태도, 국가도, 사회제도도 달라지고 있다.
국가전략은 이렇게 변화하는 환경을 담아내야 한다. 국가는 네트워크 국가로 바뀌고 있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는 그렇게 변화하는 국가의 역할을 파악하지 못했다. 거창하게 내세웠다 용두사미가 된 ‘동북아 중심국가론’이 이 정부의 인식수준을 보여준다. 우리가 동북아 허브(Hub)를 목표로 한다면 주변국이 가만있겠는가.
▼분열 극복 미래에 희망주는 정치를 ▼
유럽의 통합과 동북아시아의 부상은 세계를 다극체제로 전환한다는 점에서 많은 세계인들의 바람이기도 하다. 이에 부응해 우리는 중국 일본과 더불어 협력 체제와 역할분담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를 여는 길이다. 이것이 변화된 국가 역할을 이해하는 전략이다. 나라의 미래를 위해 가장 시급하게 착수해야 할 교육 개혁도 이해 당사자들의 세력다툼에 끌려 다니느라 원칙조차 내놓지 못하고 있다. 국민의 지식력을 높이고 자라나는 세대에게 희망을 줘야 할 우리 교육의 현실이 이렇다.
국가는 실험대상이 아니다. 이제 겨우 세계 2류국가로 올라선 우리나라가 비전 없고 원칙 없는 국가지도층 때문에 또다시 3류 이하로 전락한다면 이 나라의 국민이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이각범 한국정보통신대 교수 전 대통령정책기획수석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