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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전엔…]동아일보로 본 12월 넷째주

입력 | 2003-12-21 19:00:00

전후(戰後) 한국사회에는 댄스파티 등 미국풍의 성탄절 풍습이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1955년경 서울의 한 댄스홀에서 춤추고 있는 여성들의 치마저고리 차림이 아주 낯설다. -‘서울 20세기’ 자료사진


◇…여기는 가식된 지상의 천국. 五색도 형롱한 ‘네온싸인’이 명멸하는 우람한 ‘홀’ 정면에 ‘X마스 츄리’를 찬란히 꾸며놓고 달콤한 ‘탱고’에 몸도 가볍게 뛰노는 신사숙녀들…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원색 스란치마에 볶은 머리와 샛빨간 입술은 아무리 보아도 찰삭 어울리지 않은 풍정. 그들은 ‘X마스’를 축하하는지 또는 ‘장에 가는 영감 따라’ 하는 짓인지…. 여하튼 이 세상의 쓴맛을 알지 못한 꿈속에서나 사는 군상이었다.

◇…난장보다는 나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저녁마다 찾아드는 남대문 지하통. 헐벗고 굶주리고 학대받는 그들에게는 둘도 없는 보금자리. ‘X마스’를 축하하는 천국(?)의 풍정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언제나 다름없이 쓸쓸한 그들의 삶은 저녁만이 안식을 주는 것이었지만 이날따라 유난히 소란했고 지붕 위를 내닫는 자동차 ‘엔진’ 소리가 심야의 고요를 깨뜨리고 천둥처럼 고막을 찢었기에 단잠을 채 이루지 못한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하는 노래소리까지도 ‘싸탄’이 울부짖는 소리로만 들려왔을 뿐.

▼성탄절 화려함속에 ‘빈곤’은 여전▼

1953년은 성탄절이 한국인의 생활풍습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기 시작한 원년(元年)이었다. 일제강점기 기독교인들의 기념일에 불과하던 성탄절이 광복 직후 미군정과 6·25전쟁 등을 거치며 사실상 우리 사회의 최대 명절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게 된 것.

이 무렵 한국인치고 3년여에 걸친 전쟁의 참화를 떨쳐버리고 싶다는 절실한 심정을 갖지 않은 이 있었을까. 거기에 우리의 최대 우방으로 부상한 미국의 명절은 아주 편리한 계기를 제공했다.

국내 신문에는 관련기사가 폭주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민에게 성탄메시지를 보냈다거나 미군이 보육원에 성금을 전달했다는 등의 내용이다.

그러나 대중에게 이식(移植)된 ‘미국풍’의 성탄절은 외피뿐이었던 것 같다. 가족과 함께 하는 내용은 거의 없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뒤 경건함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게 그저 춤추고 노는 게 ‘우리의 성탄절’이었다. 댄스 풍경도 그중 하나다. 서양 춤은 ‘미8군 쇼’를 통해 본격 확산됐고, 서울 수복 후 명동과 소공동에는 댄스홀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위 기사는 전후(戰後)의 첫 성탄절 밤, 서울 남대문 지하도에선 집 없는 사람들이 노숙하는 가운데 다른 한편에선 화려한 댄스파티가 벌어진 세태를 대비해 보여준다. 새로운 명절 풍습에 대한 이질감과 소외감이 물씬 묻어난다.

지금 우리의 성탄절은 반세기 전의 그것과 얼마나 다른가.

서영아기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