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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김용희/'희망의 불씨'가 꺼지는가

입력 | 2003-12-23 18:05:00


만약 우리가 우리의 아이들에게 산타클로스를 믿도록 만든다고 해서 그것이 아이들을 잘못 인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아이에게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이의 꿈을 남겨 놓고 싶기 때문이다. 아이가 기대하는 꿈과 열망을 통해 우리 스스로가 신선한 용기를 얻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어린아이를 통해 우리 자신을 속이고 있다. 현실은 그와 같은 무제한적 관용의 세계가 아니다. 낭만적 열망을 품을 만한 낙원은 없다.

▼꿈마저 한강에 던져버린 사내 ▼

12월 19일, 우리는 매우 끔찍한 현실을 보고 말았다. 20대의 한 아버지가 도박 빚 때문에 부부싸움을 한 끝에 한강에 자신의 아이 둘을 던졌다. 사내는 인천의 한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승합차에 태웠다. 서울로 들어오면서 두 아이에게 수면제를 두 알씩 먹였고, 아이들을 머리 높이까지 들어올려 차례로 한강 물 속으로 던졌다. 사내는 “아이들은 천국에서 편히 쉬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내가 생각하는 낙원은 수면제 두 알과 차가운 강물 속이었단 말인가.

때로 희망이란 말은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하기도 한다. 지리멸렬한 삶의 끝에 ‘희망’이란 말을 떠올리면서 다시 부박한 현실을 헤쳐 나갈 힘을 얻는다. 물론 희망은 지배 권력자들이 백성을 체제 내로 길들이기 위한 정치적 위장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희망은 끝없이 유예되는 유토피아처럼 이 현실에 없는 것을 열망하는 ‘감미로운 허위’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카드 빚으로 인한 신용불량자가 400만명을 넘어섰다. 대통령은 걸핏하면 국민을 담보로 재신임론, 사퇴론을 꺼내고 있다. 대선자금 수사에서 보듯 정치권의 도덕적 해이는 국민의 환멸을 넘어섰다. 정치인들은 정쟁으로 사분오열돼 민생고를 돌아볼 여력이 없다. 예로부터 백성은 배고프게 살아 왔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백성은 배고파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희망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

사내가 차가운 강물 속으로 아이를 던진 것이 한국 정치의 무능과 현실의 척박함이 빚은 필연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도박 빚과 가정파탄으로 내몰린 한 가장의 분열증적 착란의 결과라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우리에게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미래를 바라보며 현실을 견디게 할 힘, ‘희망’이 사내에게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프랑스 나폴레옹의 군대는 무적이었다. 그런데도 나폴레옹 군대는 러시아 군대와의 싸움에서 패배했다. 나폴레옹 군대를 궁극적으로 괴롭힌 것은 동상(凍傷)과 식량보급로 단절이었다. 그렇다면 러시아 군대는 동상이 없었단 말인가. 그렇지 않았다. 러시아 군대도 똑같이 추위를 참아내야 했다. 그럼에도 그들을 견디게 한 것은 ‘희망’이었다.

원래 적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군대는 아무리 추워도 불을 피우지 못하게 되어 있다. 어느 지역 전투였던가, 프랑스 군대는 어떤 불도 피우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 군대는 막사에 단 한 개의 촛불을 켜놓았다. 러시아 군인들은 추운 대륙의 바람을 맞고 보초를 서면서도 따뜻함에 대한 ‘희망’을 생각했다. 따뜻한 불씨를 생각하며 동상을 견뎠다.

▼현실 이겨낼 ‘그 무엇’ 없을까 ▼

12·19를 추억하는 것으로 현실정치의 지난함을 극복할 수 없다. 선동적 감정주의나 성급한 개혁의지 만으로 정치지형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사회 전반의 갈등을 해소하고 침체된 경제를 살릴 수 있는 지도자의 지도력이 필요하다.

옛날 중국에서는 큰 기근이 들면 백성들이 아이를 잡아먹기도 했다. 차마 자신의 아이를 먹을 수 없어서 이웃집 아이와 서로 바꿔 잡아먹었다고 한다. 희망이 없는 자들은 잔인해진다. 백성들은 희망을 잡아먹었다.

지도자는 꺼져가는 ‘시민혁명’의 불씨를 살리기보다 백성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살려주어야 한다. 정치적 정체성과 표상을 찾아내야 한다. 한국 사회가 나아갈 ‘구체적 비전’을 제시할 때 역사를 이끌 힘이 생겨난다. 로또가 희망이 아니라 아이가 희망이다. 하나의 불씨가 희망인 것이다.

김용희 평택대 교수·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