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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서 빈민지원-교육사업 獨 슈미케씨 간암선고 쓸쓸한 타계

입력 | 2003-12-24 18:51:00

40년 동안 한국을 위해 봉사하다 11일 고향 독일에서 간암으로 숨진 슈미케씨의 생전 모습. -동아일보 자료사진


《40년간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했던’ 한 독일인이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모두의 삶이 어렵던 시절 한국인들을 끔찍이도 사랑했던 그였지만 정작 한국인들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숨을 거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부산 해운대구 우동의 학교법인 한독학원 이사장 겸 부산 주재 독일명예영사인 쿠르트 카를 슈미트케씨(62)가 11일 고향인 독일 부퍼탈시에서 간암으로 숨졌다.》

77월 6일 부산 동의대병원에서 처음 간암진단을 받을 때까지 40년간 줄곧 부산에 머물며 한국을 위해 봉사해온 그는 7월 말 치료를 위해 독일로 건너간 뒤 ‘제2의 고향’인 부산에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된 것.

16일 부퍼탈시의 한 성당에서 열린 장례식은 가족과 지인, 절친한 친구인 정순택 한독문화여고 교장(62·전 대통령교육문화수석비서관), 자신이 보낸 한국인 유학생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촐하게 치러졌다. 슈미트케씨가 처음 한국에 온 것은 1964년 2월 16일.

당시 22세였던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독일의 가톨릭계 자선단체인 ‘아시아지구 학생장려장학회’를 통해 한국을 방문했다.

천주교 부산교구에서는 그를 맞이하기 위해 당시 동아대 학생이자 교구학생회 활동을 했던 동갑내기 정 교장을 부산역으로 내보냈고 이때부터 두 사람의 인연도 시작됐다.

그는 당시 산업기반이 부실했던 한국에 실업교육기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즉시 독일정부에 지원을 요청해 1965년 남구 우암동에 한독문화여고의 전신인 한독여자기술학교를 설립했다.

이때부터 1973년까지 독일에 수백명의 학생을 산업연수생으로 보내 외화획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이후 독일정부의 지속적인 지원으로 1976년 우동에 현재의 교사를 완공했고 지리산수련원, 유치원, 부산독일문화원 등을 잇따라 건립했다.

지금까지 한독문화여고를 졸업한 학생은 2만여명에 이르며 내년 3월에는 한독외국어여고도 개교한다. 그는 또 지체장애인학교인 부산혜성학교와 부산기계공고의 설립에도 직간접적으로 기여하는 등 교육사업에 큰 공헌을 했다.

빈민구제사업에도 관심이 있었던 그는 1972년 9월 서구 구덕수원지 붕괴사고로 60명이 죽고 수백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자 독일 사회단체의 지원을 받아내 반여동에 아파트 200여가구를 건설하고 집단이주촌인 ‘무지개마을’을 만들었다.

1979년에는 고지대 철거민들을 위해 이 곳에 300여가구를 추가로 건립했고 성분도병원의 일부 건물을 지어주기도 했다.

한국정부는 그의 공로를 인정해 1974년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여했고, 독일정부도 민간인 최고훈장인 1등 십자공로훈장을 포함해 두 차례의 훈장을 줬다.

‘한국사랑’에 빠진 그는 아이를 낳는 것도 포기하고 부인 브리키테씨(53·부산독일문화원 원장)의 동의를 얻어 1970년대 후반 한국인 고아 2명을 입양했다. 딸(27)과 아들(25)은 모두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독일에서 공부하고 있다.

그는 1999년 5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한 한국과 부산을 보면 마치 전후의 상처를 딛고 일어난 조국 독일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흐뭇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그의 헌신적인 활동은 과거의 기억으로 잊혀져갔고, 그의 죽음도 함께 묻혀버린 것. 한국 정부나 부산시는 그의 장례식을 미처 알지 못해 조의를 표하지 못했다.

평생 그와 함께 교육사업을 해온 정 교장은 24일 “어려운 시절에 우리를 도와준 그를 정작 우리는 잊은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훌륭한 학교로 계속 발전시켜 달라는 그의 유언을 꼭 지켜내겠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부산=석동빈기자 mobid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