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증 소아당뇨병을 앓고 있는 손녀(7)와 손자(9)를 혼자 키우고 있는 정석순씨(64·여·경기 성남시 중원구)는 며칠 전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았다. 손녀 앞으로 200만원의 성금이 들어온 것.
반지하 월세방에 살면서 손녀에게 하루 3번 인슐린 주사를 맞혀야 하는 데다 생계까지 책임져야 하는 정씨에겐 엄청난 거금이었다.
그러나 이 돈은 독지가가 보낸 것이 아니다. 2억원 상당의 신용카드 불법할인(속칭 카드깡)을 하다 구속된 임모씨(44·여)가 속죄의 의미로 사회에 환원한 돈이다. 임씨는 정씨에게 전달된 200만원을 포함해 모두 700만원을 복지단체에 기부했다.
임씨가 난생 처음 기부를 생각한 것은 수원지법 성남지원 은택(殷澤·41·사진) 판사의 권유 때문. 은 판사는 임씨에게 부당이득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할 것을 권고했다.
은 판사가 임씨와 같은 경제사범에게 기부를 권유한 것은 올해 6월부터. 대상은 상표법이나 여신전문금융업법 등 위반으로 피해자를 특정할 수 없지만 사회 전반에 피해를 준 피고인들이다. 이들이 취득한 부당이득을 현행법상 강제로 환수할 수 없기 때문.
그러나 이중처벌 논란을 막기 위해 그 대상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초범으로 실형선고가 힘든 피고인에 한해 법정에서 공개적으로 기부의사를 묻고 기부가 이뤄지면 보호관찰 또는 사회봉사명령을 면제해 준다. 지금까지 은 판사의 권유로 23명의 피고인이 2억1050만원을 사회에 환원했다. 이 돈은 경기도 내 성남 광주 하남시 등의 50여개 사회복지시설에 전달됐다.
은 판사는 “피고인이나 그 가족들이 불우이웃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됐다며 고마움을 표시할 때가 많다”며 “불특정 다수에게 피해를 입힌 범죄자에 한해 부당이득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토록 하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성남=이재명기자 egij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