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게 항복한 후 일어난 백제의 부흥운동을 집중 조명했다. 올해 개봉됐던 영화 ‘황산벌’ 중 백제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켰던 계백 장군(박중훈 분·왼쪽)과 그의 군사들.동아일보 자료사진
◇백제부흥운동사/노중국 지음/84쪽 2만원 일조각
우선 ‘백제부흥운동’에 관한 거친 사료를 엮어 대작을 이룬 저자의 노고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백제 관련 저서에서 이 방면의 연구에 관해 언급된 적은 있지만, 이 주제만으로 독립된 저서가 출간된 것은 최초라고 하겠다. 그만큼 백제사 분야에서 부흥운동의 비중을 높여 주고 관심을 집중시켜 주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그럼에도 논란이 될 만한 내용이 많다는 것은 본서의 최대 강점인 동시에 약점이기도 하다.
저자는 부흥운동 시기의 백제를 ‘부흥 백제국’으로 일컬으면서 “당당한 국가적 실체로 인정하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미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의자왕의 뒤를 이은 풍왕을 백제 마지막 왕(32대)으로 보았고, 백강 전투가 있던 663년 9월까지 백제사에 포함시킨 바 있다. 또한 제3편의 제목인 ‘고토 회복전쟁의 수행’에서 ‘고토’는 통치권이 미치지 못하는 옛 영토를 가리킨다. 이런 점에서 의자왕이 항복한 직후 빼앗긴 땅을 즉각 되찾고자 한 ‘영토’ 수복전쟁을, ‘시간의 경과와 단절’이라는 뜻을 담은 ‘고토’ 회복전쟁이라 한 것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한편 저자는 이전에 백제 왕성(王城)인 주류성의 위치가 충남 서천군 건지산성이라는 설을 지지해 왔으나 최근 발굴 결과 건지산성이 고려시대의 성으로 밝혀지자 이 책에서는 주류성의 위치가 동진강 근처인 전북 부안군이라는 쪽으로 선회했다. 그럼에도 주류성과 직접 관련된 백강 위치만은 여전히 금강이라는 설을 좇고 있는데, 이는 지리적으로 볼 때 명백한 모순이다.
중국 역사서에서는 665년 당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가 귀국하면서 데리고 온 외국 사신들의 국적 가운데 ‘백제’가 보인다. 웅진도독부가 곧 백제임을 당나라인 스스로가 알려주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저자는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이 수반이었던 웅진도독부에 의한 통치 사실을 수록하면서, 부여융을 당나라인이라고 함으로써 웅진도독부의 역사를 백제사 체계에서 삭제했다. 중국에서 간행된 ‘중국역사지도집’에 보면 웅진도독부 시기의 백제 땅이 당나라 영토로 표시돼 있다. 중국인들은 이 무렵 한반도 서남부 지역을 자국 영토로 간주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중국에서 고구려사를 자국사로 편입시키려는 시도가 상기된다. 저자의 학문적 소신과는 무관하게 결과적으로 본서는 현재 중국인들의 역사인식과 동일하다.
저자가 학설을 주장하는 방식에서도 문제가 따른다. 일례로 소부리(백제 때 부여를 가리키는 지명)주의 설치시기 문제를 들 수 있다. 신라가 백제지역에 대한 행정지배를 단행하는 소부리주의 설치시기는 671년(문무왕 11년) 설과 672년(문무왕 12년) 설로 나뉘어 있다. 672년 설의 근거는 ‘삼국사기’ 지리지의 소부리주 관련 기사와 부여에 소재한 웅진도독부 세력들이 672년 초까지도 항전한 기록 등이다. 그러나 저자는 671년 설을 지지하면서 672년 설이 마치 ‘삼국사기’ 지리지 기사만을 근거로 삼은 것처럼 기술했다.
저자의 오랜 연구에도 불구하고 납득하기 어려운 이런 주장들과 서술방식이 본서의 가치를 격감시키고 있다. 또한 대중 역사서에도 첨부되어 있는 참고문헌이 학술서인 본서에 일절 수록되어 있지 않은 점도 아쉽다.
이 밖에도 본서의 논지나 주장과 관련해서는 많은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본서의 가치를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관련 사료를 잘 망라해 놓은 본서를 발판으로 좀 더 성숙한 연구성과를 기대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문화유적학과 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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