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각 때부터 술을 엄청 즐겼는데 올해부터 대폭 줄였습니다. 새해에는 담배도 끊을까 생각 중이고요. 왜냐하면 돈이 너무 많이 나가서요.’ ‘빚을 3000만원으로 줄이는 것이 새해 목표입니다. 부자가 되는 길은 행운이나 로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순전히 각고의 인내와 합리적인 소비, 철저한 정보 분석만이 첩경입니다.’》
2004년 새해를 며칠 남겨 두지 않은 요즘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재테크, 저축 관련 카페에서는 흥청망청 계획 없이 보낸 지난 한 해를 반성하고 알찬 새해를 다짐하는 희망의 글들이 쏟아지고 있다.
이들 희망 중에는 ‘부자 되기’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여기에는 예외 없이 충고나 조언을 아끼지 않는 ‘댓글’이 뒤따른다.
한 포털사이트에서 2004년에 원하는 재테크 방법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일주일 만에 무려 5000여건의 응답이 올라왔다. 이 중 70%가 부동산이나 주식투자보다는 절약과 저축으로 돈을 모으겠다고 밝혔다.
이는 올해 전반적으로 경기침체에 따른 가계부실에 시달린 한편으로 ‘10억원 만들기’ 등 ‘부자 되기’ 열풍에 휩싸인 현상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또 다른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10억원 만들기’ 카페에는 내년 계획을 소개하는 글이 지난 한 달 동안 200여건이나 올라왔다.
이 중에는 직장인 주부 학생 등 이른바 ‘개미’들이 인터넷에서 서로 충고를 주고받거나 도움을 주는 글도 많다.
‘연봉은 세금 제하고 3300만원쯤이고 정기적금 360만원에 청약저축 월 5만원, 그리고 은행통장에 현금 800만원 정도…지출은 월평균 적금과 보험을 합쳐 120만원, 또 휴대전화 요금, 자동차 두 대의 차량유지비가….’
‘○○님! 적자가 난다는 게 이해가 안 가네요. 내년부터 적금은 비과세 상품으로 알아보세요. 그리고 자가용은 꼭 두 대씩 굴려야 합니까. 하나는 처분하세요.’
부동산이나 주식투자 정보를 교환하는 인터넷 카페는 많이 있었지만 이렇게 개개인이 가계부를 낱낱이 공개하면서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것은 새로운 풍속도.
특히 360만명이 넘는 신용불량자들의 ‘적자인생’ 반전을 위한 야심 찬 계획이 눈에 띈다.
한 네티즌은 최근 ‘신용불량자들의 모임’ 게시판에 ‘그동안 분수에 맞지 않게 돈을 흥청망청 썼습니다. 1년이 지나서 돌아온 것은 연봉 다 날리고 카드빚 1000만원. 정신을 차렸을 땐 정말 죽고도 싶었습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그는 ‘새해에는 공사판에라도 나가서 빚을 완전히 청산하겠습니다. 여러분의 피땀 어린 가계부를 보고 느끼는 바가 많습니다’라는 다짐도 덧붙였다.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부부가 함께 다단계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더 많은 부채를 지게 됐다는 30대 직장인은 ‘차라리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이를 악물고 절약해 5년 안에 빚더미에서 탈출하겠습니다’라고 의지를 밝혔다.
이들 글에는 ‘꼭 이뤄내길 바랍니다’ ‘변변히 저축한 돈도 없는 저는 반성, 또 반성해야겠습니다’라는 댓글이 붙었다.
이런 현상에 대해 고려대 사회학과 조대엽(趙大燁) 교수는 “이들의 다짐은 수백억원대의 불법 대선자금 사건 등 ‘검은돈’으로 암울해진 사회에 신선함을 던져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정부나 시장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위기감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개인적으로나마 살 길을 모색해 보려는 민초들의 비극적인 현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유재동기자 jarret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