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쓰시마섬에 유배된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
일본군이 그에게 모자를 벗을 것을 요구하자 면암은 탄식했다.
“내가 지금 왜놈이 주는 쌀을 먹고 있으니 모자를 벗으라면 벗고, 머리를 깎으라면 깎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굶어 죽을지언정 왜놈의 쌀은 단 한 톨도 삼키지 않겠다.”
74세의 고령이었으나 의기는 하늘을 찔렀고 그의 단식에 일본은 크게 당황했다. 이토 히로부미 통감은 특명을 내렸다. “쓰시마에 조선의 쌀과 보약을 보내라.” 그는 민심의 동요를 두려워했다.
그러나 당시 면암과 함께 있었던 제자들이 남긴 ‘해외일기’에 따르면 그의 단식은 사흘 만에 끝났다. 일본 병사들이 부랴부랴 부산에서 쌀을 가져온 것.
면암은 울화증과 풍토병으로 그 반년 뒤에 병사했다.
면암의 일생은 그야말로 상소(上疏)와 유배로 점철됐다. 오늘날 그 의미는 무엇인가.
그가 살다간 19세기는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혼돈과 고뇌의 시기였다. 그들은 동아시아를 축(軸)으로 한 인식 지형에 서양을 새로이 그려 넣어야 했고 이는 성리학의 가치질서와 세계관을 헝클어 놓았다.
유림(儒林)은 만인평등과 사해동포주의를 내세우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용납할 수 없었다. 신분철폐는 사대부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땅히 배척해야 할 이단(異端)이었고 양이(洋夷)일 뿐이었다.
면암의 위정척사론은 그 정치적 선택이었다.
이이화 역사문제연구소 고문은 “북한 사학계에서도 면암은 외세저항의 측면만 부각돼 있다”며 “그러나 그 점을 평가하더라도 그가 수구세력을 대변하며 체제개혁에 정면으로 맞섰다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위정척사론은 1970년대 한국적 특수성과 민족주의가 강조되던 박정희 정권 시절 근대적 민족주의 운동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그러나 위정척사론의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은 바로 중화(中華)주의요 사대(事大)사상이었다. 그것은 중세의 봉건왕조를 떠받드는 보수적 이데올로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