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원 서울대 교수·국문학 2003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해마다 이날이면 연말정산 서류를 작성하듯 지난 1년을 되돌아봅니다.
올해가 시작되던 무렵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비록 대구 지하철 참사의 정확한 사망자 수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대통령 취임식이 행해졌지만 새 대통령은 정정당당하게 노력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를 만들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는 시대는 이제 끝내야 하며, 사회의 건강을 위해서도 부정부패는 반드시 없애야 한다고 했었지요. 희망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열심히 노력만 한다면 잘살 수 있으리라 믿어도 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실망스러운 '2003 연말정산'▼
그러나 그렇게 희망적인 한 해는 아니었습니다. 연초에 행해진 각종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희망사항 1순위로 예외 없이 물가안정이 꼽혔는데도 도대체 무엇이 잘못됐는지 집값만 다락같이 올라버렸습니다. 어떤 이는 돈이 갈 곳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또 어떤 이는 교육정책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뭐니 뭐니 해도 믿을 건 부동산밖에 없으니 빚을 얻어서라도 일단 한 채 사 두라고 충고해 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열심히 저축해서 내 집을 장만하리라던 월급쟁이의 소박한 희망은 이제 우리 국민 누구도 품고 있지 않습니다.
그다지 건강한 한 해도 아니었습니다. 올봄에는 중국에서 시작된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때문에 온 국민이 공포에 떨었는데 연말이 되니 조류독감에 돼지콜레라 그리고 광우병까지, 엎친 데 덮친 격입니다. 참, 중국엔 다시 사스가 발생했다지요? 그나마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꼼짝 않고 집에 박혀서 우리의 건강식인 된장국에 밥이나 말아 먹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집니다.
그다지 넉넉한 한 해도 아니었습니다.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 우리나라의 교수 신분증을 제시해도 자기네 은행에서 신용이 쌓이지 않았다고 카드를 발급해 주지 않더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땐 그 나라가 워낙 거만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연초부터 길거리에서 돈까지 줘 가며 신용카드를 마구 발급해 주더군요. 그 결과요?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는 속담에 딱 들어맞게 전체 인구의 10분의 1에 가까운 360여만명이 신용불량자가 되고 말았지요. 신용사회에서는 신용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만 몰랐던 탓일까요? 그런데 잃어버린 신용을 회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대신 흉기를 들고 은행을 털려는 사람들이 줄을 잇습니다. 며칠 전에는 도끼로 현금인출기를 부순 사람까지 있었다니까요. 빚 독촉에 몰린 마음 약한 사람들은 한을 품은 채 이승을 하직합니다. 죄 없는 아이들을 차가운 강물에 던져 버린 비정한 아버지 이야기는 차마 기억하기도 싫은 우리네 현실입니다.
올해의 연말정산 작업이 이렇게 끝난 건가요? 결국 우리의 2003년은 희망이 사라지고 건강하지도 넉넉하지도 않았던 해가 되는 셈이군요.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우리에게 희망을 심어주었던 대통령의 임기가 아직 4년이나 남아 있기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무언가 희망이 보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싸늘히 식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대구 지하철 참사와 같은 불상사가 발생할 때면 사고의 원인, 책임의 소재를 따지기 전에 앞 다투어 달려가 돕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여름철이면 연중행사처럼 되풀이되는 수해 때도 마찬가지지요. 연말이 되면 불우이웃을 돕는 따스한 손길도 끊이지 않습니다.
▼'뜨거운 가슴'들 아직 많아▼
텔레비전을 보세요. 누군가를 돕기 위한 사랑의 마음이 숫자로 쌓여 가고 있는 것을 거의 1년 내내 보실 수 있습니다. 그뿐인가요.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이웃을 돕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데요. 사실 이런 일의 많은 부분은 국가의 책임이고 쓰러진 이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 또한 국가의 몫입니다만 어느 누구도 국가에만 그들을 떠맡기지 않습니다. 이처럼 뜨거운 가슴을 가진 국민이 있는 한 그 누구도 우리에게서 희망을 앗아갈 수는 없을 겁니다. 2004년을 기다리면서 우리 가슴이 희망의 불씨를 품고 조용히 그러나 뜨겁게 뛰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