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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마지막 차르…1999년 옐친 대통령 사임

입력 | 2003-12-30 18:39:00


러시아의 초대 대통령 옐친. 그의 시대는 천년의 일몰(日沒)과 함께 저물었다.

1999년 12월 31일. 그가 대통령직을 전격 사임했다.

새 천년의 기대로 들떠 있던 지구촌에 그의 사임은 뜻밖이었으나 그것은 치밀하게 계산된 정치쇼였다. ‘퇴임 후’를 보장받기 위한 고도의 포석이었다.

사임 전에 그는 이미 푸틴을 후계자로 점지했고, 의회 선거에서 친(親)푸틴계 정당들을 적극 후원했다.

한때 차르(황제)라고 불렸던 옐친. 그의 지지도는 당시 1%를 밑돌았으나 42%가 그의 사임에 대해서는 “아쉽다”는 반응을 보였다. 떠나가는 그에게서 국민들은 ‘공룡 러시아’의 마지막 뒷모습을 보았다.

옐친과 고르바초프의 인연은 기구하다. 옐친을 중앙무대에 데뷔시킨 것은 고르비였으나 고르비 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옐친이었다. 사임 당시 고르비는 옐친의 닦달에 짐도 제대로 싸지 못했다.

11세 때 친구들과 무기창고에서 수류탄을 훔쳐 분해하다 폭발사고로 왼손 손가락을 잘렸던 옐친. 그는 격동의 세월을 헤쳐 왔다.

1991년 쿠데타가 일어나자 ‘탱크 위’에서 시민들의 항전을 이끌었고 1993년 공산당이 장악한 의회 건물에 포격을 퍼부었다. 그는 국민들에게 두 차례의 체첸전쟁을 안겼으며, 목숨을 건 혈관수술을 견뎌냈고, 다섯 명의 총리를 경질했다.

그는 클린턴의 말대로 ‘러시아 민주주의의 아버지’였으며 “거대한 모순덩어리”였다. ‘만취 외교’와 잦은 입원으로 ‘병상 통치’란 신조어를 만들어낸 것도 그였다.

그러나 옐친에게 가장 무서운 적(敵)은 따로 있었다.

‘빈 냄비는 탱크보다 위험했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꿈이 러시아의 ‘빈 냄비’를 채워줄 수는 없었다. 시민들은 ‘혹독한 겨울’이 닥쳐오면 기꺼이 빵과 자유를 맞바꾸려 할 것임을, 그토록 갈망해 왔던 민주주의는 더 이상 아쉬워지지 않게 될 것임을 옐친은 잘 알고 있었다.

옐친은 역사의 변곡점(變曲點)에서 나아갈 때 나아갔고 물러설 때 물러섰다.

그는 러시아 정치 곡예에 능한 지도자였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