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헤리티지는 싫다"▼
2003년 5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생애 첫 미국 방문’ 직후에 나돌았다는 뒷얘기는 마치 ‘편식 외교’의 현장을 듣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했다.
노 대통령은 5월 13일 우드로 윌슨센터와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가 공동 주최한 만찬 간담회에 참석했다.
CSIS측은 한국정부로부터 행사 주최를 부탁받긴 했지만 조지 W 부시 행정부를 감안해 보수 성향의 헤리티지재단도 함께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해 공동주최를 제안했다.
외국 국빈만찬 주최 같은 행사는 싱크탱크의 위상을 보여주기 때문에 싱크탱크들은 대체로 행사 주최를 환영할뿐 아니라 때론 이를 위해 물밑 경합을 벌이기도 한다. 따라서 CSIS가 성향이 전혀 다른 헤리티지재단에 공동주최를 제안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당시 사정을 지켜본 워싱턴 인사의 전언.
“노 대통령의 미국 일정은 백악관에서도 꼼꼼히 챙기면서 누구를 만나는지에 관심을 가졌다. 가뜩이나 한미 관계가 어색한 상황에서 행정부와 가까운 보수 성향의 싱크탱크들을 배제한 채 한국 정부가 ‘편한 사람’들만 접촉하고 갔다는 인상을 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CSIS측이 미리 손을 쓴 것이라고 생각했다.”
헤리티지는 흔쾌히 제안에 응했다. 그러나 공동주최는 무산되고 말았다. 막판에 청와대가 ‘헤리티지와는 안 된다’며 거부했다는 것이다.
조지타운대의 데이비드 스타인버그 교수는 “미국과의 대화는 직접적이어야 하고 상대방보다 더 나은 ‘논리’를 개진할 때 승자가 된다”면서 “다르고 불편하다고 해서 피하는 것보다 직접 만나고 대화에 나서는 것이 현명하다”고 말했다.
한 워싱턴 인사도 “노무현 정부의 고위 당국자들이 워싱턴에 와서 백악관 동아태 담당선임보좌관으로 내정된 마이클 그린처럼 한반도 정책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당국자들 대신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의 인사들과의 자리를 주선해 달라고 하거나 세계은행 관계자들만 만나고 가는것을 보고 아연실색한 적이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 관계자는 “당시 구체적인 방미 일정은 외교통상부에서 짰지만 CSIS가 가장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CSIS에 괜찮은 사람들이 많아서 인물을 보고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CSIS가 헤리티지재단에 공동주최를 제안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며 “헤리티지나 딕 체니 부통령과 연결된 기업연구소(AEI)가 적극적이었다면 당연히 그쪽과 했을 것”이라고 해명했다.
김정안기자 credo@donga.com
▼데이비드 스타인버그 조지타운대 교수▼
“한반도의 미래에 대해 한국에서 한국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이 자리에서 한국어로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2003년 3월 서울, 한미동맹을 주제로 열린 한 세미나장. 토론 패널리스트로 나선 데이비드 스타인버그 미 조지타운대 교수가 인사말 대신 방청객들에게 건넨 이 말은 당시 행사를 취재 중이던 기자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지난해 12월 초 워싱턴을 찾은 기자가 인터뷰 대상에서 그를 빼놓지 않은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한미 양국 정부 인사들과 밀접히 교류해 왔고 대학에서 오랫동안 한국에 대해 가르쳐 온 그로부터 ‘편향되지 않은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다.
12월 3일 오후 조지타운대 그의 연구실.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행사에 참여하고 오는 길이라며 바쁜 걸음으로 연구실에 들어서는 그에게 서울에서 받았던 ‘깊은 인상’에 대해 말하자 노 교수는 “내가 그랬던가”라며 쑥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한미관계의 현주소를 묻자 방금까지 웃음꽃을 피우던 그의 얼굴이 순간 경직됐다.
“서울과 워싱턴의 사이가 우려할 만한 수준에 와 있다.”
―보다 자세히 말한다면….
“한국의 세련되지 못한 외교와 미국의 독단적인 외교 스타일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주한 미 2사단의 한강이남 이전 문제를 일방적으로 한국에 통보했다. 오만함의 전형이다. 한국은 상대(미국)를 너무 모르고 접근하는 듯한 인상을 받아왔다.”
―예를 들자면….
“윤영관(尹永寬) 외교통상부 장관이 뉴욕에서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에게 민주당 성향의 온건파 인사 마이클 오핸론과 마이크 모치주키가 쓴 ‘한반도의 위기(Crisis on the Korean Peninsula)’라는 책을 건넨 것은 ‘모독(insult)’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지난해 10월 14일 유엔총회 참석차 뉴욕을 방문한 윤 장관은 파월 장관과 만난 자리에서 북한이 핵 시설을 폐기하는 것에 상응해 미 행정부가 북한의 대북 안전보장 및 경제관계 개선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파월 장관은 “(그건) 동맹국끼리 상대방을 대하는 예의가 아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게 당시 뉴욕 타임스의 보도였다. 이후 한국 외교부와 미 국무부는 뉴욕 타임스 보도에 대해 ‘사실과 다르다’는 성명까지 냈지만 이 자리에서 윤 장관이 파월 장관에게 문제의 책을 건넸다는 것이다.
스타인버그 교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당국자들로부터 들었다며 “당시 보도 내용은 상당 부분 사실이다”고 전한 뒤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윤 장관이 적절치 않은 책을 건네 분위기가 더 싸늘해졌다”고 말했다.
―다른 사례도 있나.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 정권 말기에 한국 외교부 고위관리가 워싱턴에서 파월 장관과 면담을 할 때였다. 당시 그 관리는 미리 준비해 온 ‘토킹 포인트(talking point·논지)’를 약 45분간 그대로 읽고 돌아가 한국 정부에 ‘우리의 입장을 다 잘 전달했다’고 보고했다고 들었다. 워싱턴 입장에서는 실소가 나오는 이야기다. 당시 회담에서는 아무런 의견 교환도 없었고, 파월 장관은 굳은 표정으로 그냥 듣고만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을 두 번 만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노 대통령이 대선 후보였을 때 로버트 갈루치 조지타운대 국제관계대학원장과 함께 서울에서 만난 적이 있다. 비서로 보이는 한 사람만을 대동하고 나와 갈루치 교수에게 ‘외교에 대해 잘 모른다. 좋은 조언을 부탁한다’며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솔직하면서도 자신감 있는 인상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에 당선된 뒤 다른 한반도 관계자들과 함께 청와대로 초청받아 갔을 때는 좀 달랐다.”
―무슨 일이 있었나.
“내가 반미 감정에 대해 물었는데 노 대통령은 ‘나는 도덕적으로 이 문제를 다룰 수 있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예상했던 일반적인 외교적 답변과는 달랐다. 지나치게 방어적이라는 느낌이 들었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스타인버그 교수는 또 이라크 파병과 북핵 문제를 연결시키는 노 대통령의 발언은 한미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두 개의 사안이 서로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공식적으로 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세련된 외교적 발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국가적 이익 등을 전체적으로 고려해 파병을 결정했다’는 정도의 발언이 적절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반론:
지난해 10월 뉴욕에서 있었던 윤 장관과 파월 장관의 회담에 배석했던 위성락(魏聖洛) 외교부 북미국장은 윤 장관이 파월 장관에게 책을 건넨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분위기는 외교부나 미 국무부가 이미 밝혔듯이 뉴욕 타임스가 보도한 것과 달랐다고 반박했다.
위 국장은 “공화당 인사라고 해서 진보 성향의 뉴욕 타임스나 저서를 안 읽는단 말이냐”고 반문하며 “파월 장관은 ‘고맙다’며 그 책을 받았고 미국 쪽 인사들은 그 정도의 열린 자세는 갖고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