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서울 출생 △2001년 성균관대 국문학과 졸업
▼시나리오 가작소감-최명훈▼
언제나처럼 누런 봉투에 담긴 원고는 우편물이 가득 담긴 바구니에 아무렇게나 던져졌다. 우체국 여직원이 건네준 등기속달 영수증을 지갑 속에 구겨 넣고 유리문을 열고 나섰다. 기억하건대 그날은 아주 추웠다. 전날 내린 눈은 아직 채 녹지 않았고, 언덕을 내려가는 길은 꽤나 미끄러웠다. 더욱이 곧 닥칠 서른의 스산함 때문에 옷을 단단히 여며야 했다.
놀이기구들이 뽑힌 생채기가 그대로 남아있는 을씨년스러운 공원을 지나서야 도서관이 보였다. 벚꽃이 필적부터 꼬박 이 길을 오르내렸다. 왠지 그날은 어디 따뜻한 구들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낮술이라도 한잔 하고픈 날이었다. 오르던 길을 내려가기란 한결 수월했고, 글쓰기라는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작업도 이쯤에서 딱 내려두고만 싶었다.
이렇게 서른의 열병을 앓고 있을 즈음, 중국에 사는 선배로부터 한번 다녀가라는 연락을 받았다. 덜렁 여권 한 장만 들고 소풍가듯 길을 올랐다. 꼬박 16시간을 중국 단둥(丹東)행 일반선실, 몸도 뒤척일 수 없는 침대칸에 갇혀 도착한 대륙은 심히 넓었다. 그곳의 추운 날씨 때문이었는지 서른의 위기감과 조바심은 꽁꽁 얼어 온데간데없었다. 돌아오기 전날 취중의 한 사내에게 멱살을 잡혀 이역만리에서 불귀의 객이 될 뻔도 했지만 용케 살아 돌아왔다. 새벽녘 갑판에 올라 붉게 물든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햇덩이를 보는 순간, 내 안에서도 그것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를 다시 쓸 용기가 생겼다.
뼛속까지 스민 중국의 한기가 채 녹기도 전에 연락을 받았다. 썩 괜찮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중국여행과 이렇듯 반가운 소식은 내게 다시 한 해를 살아갈 힘을 줬다. 당선 아닌 가작이기에, 여러 지인과 은인들에게 감사의 표현은 다음으로 미루어야겠다.
▼심사평-치열함없이 기성작가 답습작품 많아▼
신춘문예란 영화계에서 어떤 위치와 의미를 가질까, 영화제작을 목적으로 하는 타 시나리오 공모전과는 달리 지금 우리가 잃어버린 어떤 것에 대한 보루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공모작들을 읽어가면서 차츰 가슴이 아파왔다. 뜨거운 산업적 열기 속에서도 우리 영화를 작품적으로 진일보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기성작가들의 그릇된 편견과 경향이 응모작들 속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진정성이나 작품성이 도움이 안 될 뿐 아니라 흥행을 방해한다는 그릇된 선입견은 재능 없는 작가들에게 면죄부를 찍어주며 패스트푸드 같은 얄팍한 기획영화들을 양산하게 하고 있다. 그러한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 독창적이고 대안적인 실험의지, 그리고 자신의 진정성을 지켜내고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려는 치열함 등으로 무장한 신인작가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응모작가 중에 그러한 미덕을 갖추고 있는 신인을 찾아내지 못해 안타깝다. 응모작가들이 기성작가들보다도 더 현실에 순응주의적이라는 인상과 영화계의 성공신화가 그들에게서 강박증세로 나타나고 있다는 인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타 작품들에 비해 두드러졌던 ‘축복’, ‘복날’, ‘달빛소리’, ‘제3서고’ 중에서, 기발한 착상이 용두사미가 된 듯하여 아쉬움이 크지만 도서관을 배경으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지워버리면서 인간의 심리를 해체하려 시도했던 ‘제3서고’를 가작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가작이라도 낼 것인가를 마지막까지 고민하였다. 가작이라는 절반의 시상이 예비작가들에게 한편으로 용기를 북돋아주면서 한편으론 자성과 정진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이광모 영화감독·영화사 ‘백두대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