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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를 다시 보자]북한의 고분벽화…강서대묘(상)

입력 | 2003-12-31 16:48:00

강서대묘의 청룡도. 웅혼하고 힘찬 모습이 압록강의 구비구비를 닮았다. -사진제공 이태호 교수


《중국의 고구려사빼앗기는 ‘역사의 현재성’을 일깨우면서 우리에게 심각한 성찰을 촉구하고 있다. 우리는 고구려를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가. 기억하지 못하는 역사를 두고 ‘우리의 역사’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본보는 고구려를 오늘에 생생히 되살려 왜 고구려사가 우리의 역사인지 알리는 기획으로 ‘고구려를 다시보자’를 매주 게재한다. 중국에 맞서 동북아시아를 호령했던 고구려의 웅혼한 정신, 동 시대 세계 어느 문명과 비교해도 뛰어났던 고구려인의 미의식과 생활상, 고구려를 건설하고 발전시킨 사람들의 삶을 조명할 것이다.고구려인들은 자신들의 삶을 증언하는 90여기의 고분벽화를 남겼다.우선 고분벽화를 통해 고구려인의 세계로 들어가 본다. 1998년 북한을 방문해 사신(四神)의 모습을 확인하고 돌아온 명지대 이태호 교수가 이를 3회에 걸쳐 소개한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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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대묘 묘실 안의 필자. -사진제공 이태호 교수

5년 전 풍성한 가을을 예고하던 8월 말 제주의 강요배 화백과 북한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평양의 서쪽 대동강 들판을 가로질러 멀리 솔밭 속의 세 고분이 눈에 들어오면서부터 가슴이 울렁이기 시작했다. 미술사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꿈에도 그리던 고구려 벽화고분, 강서대묘와 중묘가 누렇게 물든 들판 가운데 봉긋봉긋 자리 잡고 있었다.

비좁은 통로를 지나 들어선 고분 안은 깜깜했다. 잠시 후 라이트가 켜지자 묘실 내부는 생각보다 넉넉했다. 금세 보호막으로 설치된 유리가 드러났고 유리창에는 우유빛 성에가 끼어 짙은 안개 속에 들어 있는 것 같았다.

10여분쯤 지나자 서서히 성에가 걷히며 속살을 드러낸 벽화는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황홀경이었다. 탄성이 절로 쏟아졌고 도저히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그날 저녁, 우리 일행을 안내했던 분들이 그런 나를 보고 꼭 미친 사람 같아서 속으로 걱정스러웠다고 했을 정도였다.

사신도와 천장벽화는 웅혼한 형상미와 화려한 색감으로 별세계를 연출하고 있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고구려 시대의 옛 그림으로 보이지 않아서였다. 내가 고분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고구려의 화가가 막 벽화를 마무리하고 나가지 않았을까 하는 환각까지 일게 했다.

이들 벽화는 일제강점기부터 발간된 도록을 통해 눈에 익었던 터라 치밀하면서 탄력이 넘치는 그 형상은 벌써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하지만 색감은 전혀 달랐다. 잘 다듬은 판석(板石)에 직접 그린 벽화는 고분 내부의 습기를 머금고 그렇게 첫 형상미와 색채감을 선명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묘실 안에는 1400년 동안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지상을 날고 있는 청룡 백호 현무 주작, 그리고 중앙 천장의 똬리를 튼 황룡, 구김살 없이 꿈틀대는 모습의 영물(靈物)들은 또 하나의 거대한 고구려였다. 당시 동아시아의 패자(覇者)로 군림했던 고구려, 중국 수나라와 당나라의 100만 대군을 물리친 고구려 사람들의 당찬 기백이었다.

이들 벽화를 보며 나는 랴오둥과 만주지역의 억센 산세와 들판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베이징에서 평양으로 가는 동안 고려항공 비행기 창문을 통해 벅찬 감동으로 내려다보았던 풍경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청룡이나 백호는 굽이굽이의 압록강을 닮았고 천장화의 황룡은 흰 구름을 쏟아내는 백두산을 연상시켰다. 그 광활한 땅에서 말을 달리던 고구려 사람들의 심상이 그대로 강서대묘와 중묘의 벽화에 낱낱이 새겨진 것 같았다.

사신도 벽면 위로 꽉 채워 그린 천장 받침의 벽화 또한 황룡과 어울려 화사하고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네 벽과 천장을 가르는 당초(唐草)무늬띠, 구름과 어울린 비천(飛天)과 신선(神仙)상, 숲이 있는 산악도, 기린과 봉황, 연꽃 및 인동 같은 상서로운 동식물들은 고구려 사람들이 상상한 내세의 선계(仙界)를 보여주었다. 또 바닥에 나란히 놓인 두 관대(棺臺)의 장식무늬와 함께 전체 육면체 공간이 한 덩어리의 입체그림이었다.

또한 섬세하고 치밀한 묘사의 먹선과 적황록 등의 색채는 탄력이 넘치는 형상들에 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는 듯했다. 특히 붉은색은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마력을 내뿜었다. 여기에 녹색과 황색 갈색의 화사하고 명랑한 어울림과 흰색의 마감은 절묘했다. 고구려 사람들이 그 대지에서 겪었던, 그리고 우리가 지금 여전히 만나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맑고 투명한 원색을 그렇게 녹여낸 것 같았다.

힘차고 간결한 형상에 치밀한 선묘와 화사한 색채의 조화, 그것은 보편적인 회화미와 미학적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화려하다고 할 때, 힘차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또 기운찬 형상이 화려하다거나 치밀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런데 강서고분의 벽화는 그 대조적인 양자를 함께 어울려 낸 것이다. 색채가 형상을 이처럼 완벽하게 만드는 사례가 또 있을까. 세계미술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든 회화미일 게다.

마음을 진정하고 고분 내부를 찬찬히 살폈다. 보호유리로 벽화를 잘 보존한 상태로 관람할 수 있게 해주어 안심이 되면서도 유리를 통해 그림을 확인하자니 아쉬움도 일었다. 그런데 강서대묘의 묘실 남쪽 통로와 연결된 벽화의 한 부분이 한 뼘쯤 유리 밖으로 드러나 있어 벽화기법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주작도의 가장자리에 당초무늬가 빙 둘러쳐진 부분이었다.

랜턴을 비추어가며 손으로 만져보니 밋밋한 석면에 채색만 한 게 아니고 무늬 부분이 약간 도드라지게 처리되어 있었다. 그 위에 칠한 채색은 붓질을 했다기보다 얕은 부조 위에 안료를 먹였다는 느낌이 들었다. 화사하고 명랑한 색채감이 웅혼한 형상과 그처럼 잘 어울리게 하는 기발한 방식이구나 하는 생각에 감탄이 절로 일었다.

그야말로 새로운 발견이었다. 이전의 강서대묘에 대한 발굴보고서나 글에서 읽지 못했던 기법이었다. 그리고 다른 어느 지역의 벽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화법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나는 이를 석면저부조화법(石面底浮彫畵法)이라고 이름 지어 보았다. 석면저부조화법은 넓은 판석으로 묘실 벽면을 축조해야 가능한, 가장 신경 써야 하는 기법이다. 무덤을 축조하기 전 치밀한 설계에 따라 디자인 계획을 세우고 벽화 제작에 들어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판석에 밑그림을 따라 미리 사신의 외모를 뜨고 그 형상을 따라 석면을 아주 얕은 부조로 쫀 뒤 묘실을 조성해 놓고 벽화를 그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같은 강서대묘의 사신도를 비롯한 벽화는 고구려 고분벽화 중에서 가장 기세등등하고 세련된 필치의 회화성을 자랑한다. 평양 근처의 진파리 1호분이나 중국 지린성 퉁거우지방의 후기 고분벽화에 보이는 사신도도 배경의 장식문양을 없애 버리고 사신을 각 화면에 단독 배치함으로써 공간을 대담하게 해석한 점이 특출하다. 더욱이 저부조의 정련되고 생동감 넘치는 필치와 원색조의 화려한 채색으로 마감해 벽화의 물상들이 실제 뛰쳐나올 듯 육박하는 감동을 자아낸다. 고구려 사람들이 창출해낸 양식을 보여주는 동시에 중국 수나라에 이어 당나라 대군의 침략을 이겨내면서 승리감에 고조된 시절, 고구려 회화의 최고 수준을 대변해 준다고 하겠다. 고구려는 패망 직전까지 그렇게 독자적인 문화의 절정기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태호 교수

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이태호교수 약력▼

△1952년 전북 옥구(현 군산시) 출생

△1974년 홍익대 회화과 졸업

△1978년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석사)

△1978~82년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사

△1982~2002년 전남대 미술교육과 교수

△현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