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시장 자율을 주장하는 기업들과 소유·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하는 정부의 대립이 여전할 전망이다. 본보 경제부가 주최한 ‘2004년 경제정책 좌담회’에 정부와 재계를 대표해 참석한 경제 전문가들은 경제 활성화에는 동감하면서도 구체적인 실행 방안에서는 크게 엇갈렸다. 왼쪽부터 정창영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 김미옥기자
《올해 한국 경제는 장기침체냐 회복이냐의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 세계 경제 회생과 수출 호조라는 긍정적 요인이 있는 반면 내수 위축, 성장 동력의 부재라는 내부 악재는 여전하기 때문이다. 특히 기업의 투자 의욕 저하와 금융 시장 불안은 올해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을 최대 걸림돌로 꼽힌다. 본보 경제부는 신년기획의 하나로 올해 기업 및 금융정책이 가야할 방향을 집중조명하는 ‘2004년 경제정책 좌담회’를 열었다. 권순활(權純活) 본보 경제부 차장의 사회로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일보사 19층 회의실에서 2시간30분 동안 열린 좌담회에는 강철규(姜哲圭) 공정거래위원장, 정창영(鄭暢泳)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좌승희(左承喜·이상 가나다 순) 한국경제연구원장이 참석했다.》
▽사회=최근 정부가 마련한 ‘시장개혁 3개년 계획 로드맵’은 대기업 총수의 지배력을 견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출자총액제한제도(출자규제) 개편이 주요 내용인데 여전히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올해 대기업 정책의 근간인 시장개혁 3개년 계획부터 이야기를 시작할까요.
▽강철규 위원장=시장개혁 로드맵의 목표는 기업의 소유·지배구조를 개선해 경영 투명성을 높이는 데 있습니다. 이를 위해 정부가 일방적으로 강요하던 출자규제를 인센티브제를 통한 시장 자율 감시체제로 바꾸기로 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부채비율 100% 이하’이던 출자규제 졸업 대상을 집중투표제나 서면투표제, 내부거래위원회 등을 도입한 기업으로 바꿨습니다. 지주회사로 전환하거나 3단계 이상 출자를 하지 않고, 계열사가 5개 이하, 소유·지배 괴리도가 2.0 이하인 기업집단(그룹)도 출자규제에서 제외키로 했습니다.
▽좌승희 원장=시장개혁 로드맵이 추구하는 목표는 맞습니다. 하지만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습니다. 집중투표제를 요구하거나 별도의 내부거래위원회를 두라고 하는 것은 기업의 경영 프로세스까지 정부가 규제하겠다는 것입니다. 정부가 이사회 결정 사안에 대해서까지 간섭하면 기업의 자생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창영 교수=세계가 ‘글로벌 경쟁’이라는 화두를 안고 뛰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기업 정책도 글로벌 경쟁이라는 측면에서 다뤄야 합니다. 외국 기업은 자유로운 출자를 통해 무한 경쟁을 하고 있는데 한국 기업은 출자규제로 인해 투자가 제한된 상태입니다. 정부가 외국 기업과 국내 기업이 똑같은 여건에서 경쟁할 수 있는 기반을 보장해줘야 합니다.
▽사회=정부는 대기업의 바람직한 지배구조도 몇 가지 형태로 제시했습니다. 지주회사나 브랜드를 공유하는 느슨한 연계 체제, 소(小)그룹화 등입니다. 하지만 이는 기업의 경쟁력 강화라는 본연의 취지에 어긋난다는 지적도 나옵니다만….
▽강 위원장=현재 대기업 지배구조의 문제는 대기업 총수가 가공(架空) 자본을 만들어 실제 지분보다 과도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계열사 한두 곳이 망가지면 그룹 전체가 동반 부실화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또 중소기업의 발전을 억제하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전체 고용의 85%를 담당하는 중소기업이 크지 않고는 한국 경제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출자규제는 기업 안에서 견제와 균형 시스템이 갖춰지도록 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공정한 경쟁을 가능케 하는 정책 수단입니다.
▽좌 원장=정부는 20년 가까이 경제력 집중 억제 정책을 펴 왔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이루었습니까.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는 오히려 ‘삼성 공화국’이 됐습니다. 외국에도 그룹이 있지만 정부가 지배구조를 문제 삼지는 않습니다. 기업들이 택한 경영 방식을 인정해 줍니다. 반면 한국은 투자 자체를 제한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수많은 대기업들이 1970년대식 산업에만 매달려 있습니다. 중소기업의 발전도 대기업이 잘돼야 가능합니다. 대기업을 묶어두면 하청 중소기업은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 교수=기업의 지배구조를 개선해 투명성을 높이겠다는 원칙은 맞습니다. 하지만 정부의 대기업 정책은 투자 위축으로 귀결돼 한국 경제가 자동차와 반도체 이후 새 성장 동력을 찾지 못하는 상황을 초래했습니다. 한국 경제가 활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중소기업에는 자유로운 시장 진입을 허용하고, 대기업에는 글로벌 경쟁이 가능한 발판을 마련해줘야 합니다. 정부 정책도 글로벌 기업 10∼15개가 나와 한국 경제의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사회=금융시장으로 주제를 돌려보겠습니다. 최근 외국 자본의 금융시장 장악에 대한 우려가 높습니다. 작년 9월 말 현재 시중은행의 외국인 지분은 43%에 달합니다. 제일 한미 외환은행의 경영권이 외국인에게 넘어간 데 이어 올해는 우리금융지주와 한국투자증권, 대한투자증권의 매각이 예정돼 있습니다. 외국 자본의 진출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좌 원장=금융시장과 관련한 정부 정책은 산업 자본의 금융지배 방지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원칙에는 찬성합니다. 하지만 정책 방향이 내국 자본에 대한 차별로 이어져서는 안 됩니다. 국내 금융회사를 취득한 외국 자본이 산업 자본인지, 금융 자본인지 확실치 않습니다. 그런데도 한국의 산업 자본이 금융회사를 취득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금지돼 있습니다. 경쟁에는 동일한 조건이 보장돼야 합니다.
▽정 교수=한국 금융시장은 개방체제로 가야 합니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외국 자본의 국내 금융시장 진출 속도는 너무 빠릅니다. 이는 외환위기 이후 부실은행과 부실기업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금융적 측면만을 강조한 때문입니다. 증권 시장에서 외국인들의 비중은 갈수록 커지는데 국내 연·기금은 증시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방치하면 국내 금융시장은 외국인의 독무대가 됩니다. 금융시장의 과실을 외국인이 모두 가져가게 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강 위원장=글로벌 경제에서 자본의 국적을 가려서는 안 되지만 한 나라의 기간산업은 예외입니다. 금융산업은 준(準)공공재의 영역에 속하는 만큼 기간산업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외국인이 모두 가져가는 것은 문제입니다. 외국 자본의 유입은 금융 회사의 경영과 자산 투명성을 제고하고 첨단 위험 관리 기법을 전파하는 긍정적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일단 경제가 위기상황에 처하면 외자가 급격히 유출돼 이로 인한 시스템 리스크가 발생하거나 국내 산업 정보가 해외로 빠져 나가는 부작용도 있습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외국 자본에 대한 최소한의 금융기능 유지 의무를 부여하거나 국내 은행을 국내 기관 투자가에 우선 매각하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외국 자본의 성격과 건전성 심사를 강화하고 국내 금융 기관을 외국에 팔 때 펀드보다는 은행 자본에 우선권을 주는 방안도 검토해야 합니다.
▽사회=외국인들의 국내 금융시장 독식과 관련해 일각에서는 자금 동원력이 있는 산업 자본이 금융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또 실체가 불분명한 외국계 펀드는 국내 금융회사를 마음대로 소유할 수 있지만 국내 자본들은 지분 제한에 걸려 있다는 ‘역(逆)차별론’도 나오는 실정입니다. 이 문제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좌 원장=산업 자본이 금융 자본을 소유하게 되면 특정 기업에 대한 편중 대출 등의 문제가 생깁니다. 하지만 기업에 대한 편중 대출은 소유 구조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는 엄격한 사후 감독을 통해 막을 수 있습니다.
▽강 위원장=산업 자본과 금융 자본은 수레의 두 바퀴처럼 일정한 간격을 둬야 합니다. 한데 뭉치면 불공정 경쟁과 편중 대출 등 견제와 균형이라는 시스템이 파괴될 수 있습니다. 실제 부당내부거래 가운데 금융회사를 통한 게 86%에 이릅니다.
▽정 교수=정부가 겉으로는 역차별이 없다고 하지만 실제 외환위기 이후 금융회사 매각에서 국내 자본은 배제돼 있었습니다. 산업 자본이 금융 자본을 지배하면 건전성이 악화될 수 있다고 하지만 이는 금융감독 당국이 성실하게 의무를 수행하지 않을 때 생기는 문제입니다.
▽사회=마지막으로 올해 경제 정책이 추구해야 할 종합적인 방향에 대한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좌 원장=선의(善意)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습니다. 경제력 집중 억제는 19세기나 20세기 초반의 이슈입니다. 잘하는 기업은 계속 잘할 수 있도록 밀어주는 정책이 필요합니다.
▽강 위원장=정책의 초점은 투명성과 공정성에 맞춰져야 합니다. 경쟁을 배제하는 장애물은 걷어내야 합니다. 그게 선진국 문턱에 와 있는 한국의 과제입니다.
▽정 교수=제일 염두에 둘 부분은 글로벌 경쟁입니다. 눈을 안에서 밖으로 돌려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가 국내 자본이든 해외 자본이든 차별하지 않아야 하고,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기업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보여줘야 합니다.
▽사회=오랜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정부가 지금 한국 경제를 위해 무엇을 신경 쓰고 서둘러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리=고기정기자 koh@donga.com
▼참석자 프로필 ▼
강철규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
△1945년생
△미국 노스웨스턴대 경제학 박사
△산업연구원(KIET) 선임연구위원
△서울시립대 경제학과 교수
△경실련 상임집행위원회 위원장
△규제개혁위원회 공동위원장
△부패방지위원회 위원장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현재)
정창영 연세대 교수
△1943년생
△미국 남캘리포니아대 경제학 박사
△금융발전심의위원회 위원
△연세대 행정 대외 부총장
△국민경제자문회의 위원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한국경제학회, 한국국제경제학회 회장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현재)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 원장
△1947년생
△미국 UCLA 경제학 박사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
△정보통신부 통신위원회 위원
△정부혁신추진위원회 위원
△국제자유도시포럼 공동대표
△한국경제연구원 원장(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