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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만이 살길이다]사양산업은 없다

입력 | 2004-01-04 18:06:00


《KOTRA 상하이무역관 박한진 과장은 작년 말 가족들과 함께 할 틈이 없었다. ‘중국에 투자를 하겠다’며 찾아오는 중소기업인들을 안내하느라 바빴던 것. “공장을 중국으로 옮기겠다는 기업인이 하루에도 몇 명씩 찾아옵니다. 이런 속도라면 한국에 어떤 중소기업이 남아 있을지 걱정입니다.” 작년 말 각 그룹은 2004년에는 신규투자를 늘리겠다고 앞다퉈 발표했다. 그러나 한 꺼풀 벗기면 사정은 다르다. 초박막트랜지스터 액정표시장치(TFT-LCD)와 플라스마 디스플레이 패널(PDP) 등 정보기술(IT)산업에 대한 투자를 빼면 국내 신규투자는 거의 없다. 포스코는 올해 작년보다 30% 이상 늘어난 2조원을 투자하지만 대부분 중국, 태국, 인도, 베트남 등 동남아에 투자한다. 현대차도 마찬가지. 중국시장의 부상, 투자수익성, 주요 산업의 과잉설비 등을 감안하면 개별 기업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이다.

그러나 최근 한국기업들의 투자전략에는 한 가지 중요한 점이 빠져있다. 신기술과 생산성 향상 등 혁신에 대한 투자가 부족하다는 점.》

산업연구원(KIET) 산업경쟁력실 하병기 실장은 “값싼 노동력이나 관치금융으로 지원된 저리자금을 집중투입해 선진국 기업을 모방하는 전략은 이미 통하지 않으며 임금 따먹기식 해외진출도 한계가 있다”며 “생산성 향상을 위한 소프트웨어에 투자가 더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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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斜陽)산업은 없다=국내 기업인들은 “노동집약산업은 물론이고 중화학산업의 경쟁력 상실도 시간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일정 부분 사실이다. 각종 규제, 전투적 노사관계 등 기업의 발목을 잡는 요소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새로운 길을 개척한 기업들도 많다. 특히 가장 조건이 열악하다는 노동집약적인 산업에서의 성공사례는 경영진의 전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준다.

경남 김해시의 신발업체 ‘우연’은 독자기술을 바탕으로 선수용 사이클 신발에서 세계시장점유율 40%를 넘는다. 탄소섬유를 가공하는 신발밑창 제작 등 고부가가치 공정은 한국에서 하고 나머지 일반 부품생산과 조립은 중국에서 한다.

봉제완구를 생산하는 오로라월드는 중소기업이지만 글로벌 기업이다. 서울 본사직원의 40%는 디자이너일 정도로 제품개발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본사는 제품기획, 샘플제작, 마케팅 전략만을 수립한다. 미국 영국 홍콩 현지법인은 판매와 시장조사를 담당하며 생산은 중국과 인도네시아에서 맡는다. 이 회사 옥윤창 마케팅 팀장은 “인건비 상승과 개발도상국의 추격 등으로 전체 산업의 경쟁우위가 떨어지더라도 기술개발, 품질향상, 브랜드 파워, 고가(高價)시장의 개발 등의 방법으로 기업의 변신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힘줘 말했다.

기술이나 브랜드에 대한 투자 없이 값싼 노동력만 찾아 떠나는 철새기업은 한계가 있다는 것.

▽생산성 향상, 가능하다=컨설팅업체인 부즈알렌&해밀턴의 최준 이사는 “한국의 주요 산업은 아직도 혁신에 대한 투자로 생산성 향상을 꾀할 여지가 많이 있는데 여전히 매출이나 시장점유율에 집착해 기업가치를 파괴하는 경영자가 많다”고 지적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한국의 기술수준(총요소생산성)은 미국의 절반수준에도 못 미친다. 싱가포르나 홍콩이 미국의 90%까지 접근한 것과는 큰 차이다. 주목할 점은 90년대 이후 기술격차가 줄어들지 않고 있다는 사실.

생산성 향상이 어렵기는 하지만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포스코는 2000년 프라이스워터하우스(Pwc) 등 5개사 컨설턴트와 포스코 직원 2000여명을 투입해 대대적인 경영혁신운동을 시작했다. 2000억원이 투자된 이 혁신프로그램의 성과로 매년 1000억원 이상의 경비절감 효과를 거뒀다. 뿐만 아니라 신제품 개발기간이 4년에서 1년으로 단축됐고 납기도 30일에서 14일로 절반으로 줄였다.

냉장고, 에어컨 등 가전을 생산하는 LG전자 창원공장도 생산성 향상이 무엇인지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1996년부터 혁신활동이 시작된 이 공장은 공장 부지나 설비를 늘리지 않고 인력도 8000명에서 6000명으로 줄였음에도 불구하고 매출은 연평균 30%가까이 성장했다.

비용을 줄이는 디자인이나 기술개발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소프트웨어에 투자해 생산성 향상을 꾀한 것.

▽혁신에 투자하는 기업만이 살아남는다=유한킴벌리는 킴벌리클라크가 전 세계 127개국에서 운영 중인 공장 중에서 생산성 1등을 지키고 있다. 문국현 사장은 그 비결을 “양보다는 질, 기계보다는 사람에 대한 투자”라고 짧게 말한다.

끊임없는 생산성 향상, 고부가가치 상품 개발, 브랜드 파워 증대는 모두 사람에 대한 투자에서 나온다는 것. 때문에 이 회사의 현장 근로자는 연간 300시간의 교육을 받는다. 육체 근로자를 지식 근로자로 만든 것.

성공적인 구조조정의 사례로 주목받는 이랜드 역시 성공비결은 새로운 인사시스템, 디자인, 매장관리, 재고관리 등 혁신활동에 투자한 덕분이었다. 이 회사 장광규 상무는 “지식경영이 가능하도록 소프트웨어에 투자하는 것이 장기적인 성공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구조조정과정에서 깨달았다”고 말했다.

이병기기자 ey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