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묵 사려. 찹쌀떠∼억….”
매서운 삭풍(朔風)이 몰아치는 겨울밤. 인적 끊긴 골목길에 야식행상의 외침소리마저 아스라이 멀어져갈 즈음. 어디선가 밤의 정적을 가르는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진다. 에에엥∼에에엥∼.
그 시절, 매일 밤 자정이 되면 야간통행금지를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다.
군사정권은 밤의 도시를 병영(兵營)처럼 지배했다. 사이렌 소리는 군인들의 취침을 알리는 나팔소리와 다르지 않았다. 하루 24시간 가운데 4시간이 고스란히 지워졌다. 발이 묶인 밤은 차츰 몸의 기억 속에서도 사라져갔다.
야간통금이 해제된 것은 1982년 1월 5일 자정을 기해서였다.
37년 만이었다. 당시에는 통금 해제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너무 오랫동안 ‘새장’ 속에 갇혀 있었던 것일까.
야간통금이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폭압적인 정권에 의해 사라진 것은 맹랑하기만 하다. ‘선심성 정책’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받기도 했으나 올림픽을 통금 아래서 치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전광석화처럼 개혁을 단행했다.
1980년 망국병으로 치부돼 온 과외에 철퇴를 내렸고 1982년 신정 연휴기간 중에 통금 해제를 깜짝 발표했다. 중고교 교복과 두발 자율화 조치도 뒤따랐다. 프로야구도 출범했다.
5공은 이렇듯 자율화와 개혁조치로 닻을 올렸으나 집권기간 내내 길거리로 뛰쳐나온 대학생들의 화염병 시위와 최루탄 연기로 얼룩져야 했다.
야간통행금지는 조선조에도 있었다. 당시 한성의 4대문과 4소문은 종루에서 밤 10시경에 울리는 28번의 인정(人定)소리에 맞추어 닫히고, 새벽 4시경에 울리는 33번의 파루(罷漏)소리에 맞추어 열렸다.
이 때문에 통금이 시작되는 인정과 통금이 풀리는 파루 때에는 사람의 모임과 흩어짐이 마치 구름 같다 하여 종루가 있는 지금의 종로2가는 ‘운종가(雲從街)’로 불렸다.
또 통금 위반자는 밤 11시, 새벽 1시, 새벽 3시에 북을 치도록 했는데 여기에서 ‘경을 칠 놈’이란 말이 유래했다던가.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