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에 있어서 1등은 어느 나라인가.
“한국이다. 40년 전만 해도 한국에는 기업이 거의 없었다.…오늘날 한국은 24개가량의 산업에서 세계 일류 수준이고 몇몇 분야에서는 선두주자다.”
세계적 경영학자인 피터 드러커가 저서 ‘넥스트 소사이어티’에 소개한 인터뷰 내용이다.
한국인은 창업가 정신에서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미국의 밥슨 칼리지 등이 2002년 펴낸 GEM(Global Entre-preneurship Monitor) 보고서에서도 한국의 창업가 정신 순위는 4위다. 브라질이나 중국 같은 개도국이나 미국, 일본 같은 선진국보다 훨씬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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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재 “국내의 창업가 정신이 탄탄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대기업의 투자 위축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중소기업들도 손 뗄 궁리만 한다.
▽“이 땅에서 사업하기 싫다”=이런 현상은 크게 줄어드는 신설 법인의 수치로도 확인된다.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울산, 경기 수원시 등 8개 도시에서의 신설 법인 수는 2000년 말 4만1460개에서 작년 11월 현재 3만662개로 줄었다.(한국은행 통계)
A씨(53·경기 김포시)는 지난해 초 부친에게 물려받아 30년가량을 운영하던 파이프 생산 공장을 정리했다. 회사를 정리해 챙긴 100억원으로 서울 강남에 빌딩을 마련해 연간 수억원대에 이르는 임대료를 받아 생활한다. A씨는 “노조가 집에 찾아와서 소동을 벌이는 바람에 가족들이 노이로제에 시달렸다”고 말했다.
D제과의 협력업체를 운영하는 B사장(54·충남 논산시)은 “중소기업 사장단 모임에 나가보니 ‘어떻게 하면 사업을 정리하고 발을 뺄까’하는 고민뿐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중소기협중앙회가 얼마 전 중소기업 대표이사 323명을 대상으로 ‘현 사업을 2세에게 물려줄 생각인가’라고 질문한 결과 75.2%가 ‘전혀 아니다’라고 답했다.
▽반(反)기업 정서=한국 사회의 유별난 반기업 정서도 창업가 정신을 갉아먹는 주요 요인.
작년 말 대한상공회의소가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기업호감지수(CFI)’는 100점 만점에 38.2에 불과했다.
물론 1차적 책임은 기업에 있다. 지난해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SK 분식회계나 주요 기업의 불법 대선자금 등은 기업의 도덕성을 다시 한번 땅에 떨어뜨렸다.
하지만 잘못된 교육의 탓도 적지 않다.
‘기업은 의료사업 장학사업 불우이웃돕기 문화사업 등 지역 사회복지 활동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대기업은 작은 규모의 기업을 어떤 식으로든 억압해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고등학교 경제).
한국의 초중고교 교과서는 기업을 비윤리적으로 묘사하거나, 기업의 역할을 오도하는 일이 잦다.
대한상의 손영기 경제교육TF팀장은 “기업은 사적 이윤을 좇는다. 그 결과 고용을 창출하고 경제성장을 이끌며 납세도 한다”며 “국내 교과서는 이 부분을 도외시한다”고 지적했다.
▽아직은 창업가 정신이 필요하다=삼성경제연구소의 윤순봉 전무는 “2002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만13달러로 매년 2∼3%씩 성장하면 2010년에도 기껏해야 1만5000달러 정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한국은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성장성이 높은 기업을 키워야 한다는 것. 다만 성공 가능성과 위험을 치밀하게 계산한 뒤 결단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창업가 정신이란 ‘브레이크 없는 무모함’이 아니라 ‘모색과 실험을 회피하지 않는 개방성’이다.
삼성경제연구소의 한창수 수석연구원은 “미국의 경우 실패한 경영자라도 패자부활전의 기회가 열려 있다”며 “이 때문에 경영인들이 모험을 피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반면 우리 기업인은 부도를 내면 감옥에 간다. 대주주는 지분만큼의 유한책임이 아닌 무한책임을 요구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나연기자 larosa@donga.com
홍석민기자 sm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