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일본에서 발생한 사무라이 반란 사건을 기본 모티브로 삼은 에드워드 즈윅 감독의 ‘라스트 사무라이’. 구 시대와 새 시대가 충돌하는 변혁의 시기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두 차례의 장대한 전투신이 압권이다. 사진제공 올댓시네마
톰 크루즈가 푸른 눈의 사무라이로 변신했다.
액션 대서사극 ‘라스트 사무라이’(감독 에드워드 즈윅)에서는 다행히(?) 머리에 일본식 상투는 안틀었지만 일본 전통 옷과 갑옷 차림으로 등장해 검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톰 크루즈를 볼 수 있다. 그는 천황의 개방정책에 저항하는 무사집단을 물리치기 위해 일본 군대의 훈련교관으로 고용됐으나 훗날 사무라이 정신에 매료되는 미군 대위 네이든 알그렌으로 출연한다.
실제 있었던 사무라이 반란사건(1876∼1877년)을 소재로 삼은 이 영화의 주 무대는 19세기 일본. 등장인물도 거의 다 일본인들이다. 알그렌이 지휘하는 일본 군대는 총기 훈련을 미처 받지도 못한 상태에서 칼을 든 사무라이 군대와 전투를 벌이다 처참하게 패한다. 사무라이 마을에 포로로 끌려간 알그렌은 그 곳에서 명예를 존중하고 단순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무사도에 깊이 빠져든다. 마침내 그는 스스로 사무라이 편을 선택하고, 천황의 잘 훈련된 신식 군대와 무기에 맞서 목숨을 건 최후의 결전을 펼친다.
미군 장교를 일본 무사로 변신하게 이끄는 주역은 사무라이의 주군 가쓰모토(켄 와나타베). 물밀 듯이 쏟아져오는 서구 문물의 홍수 속에 사라져가는 일본의 전통과 혼을 지키고자 개혁반대의 선봉에 선 인물이다.
알그렌과 가쓰모토는 변혁의 시기를 살아가는 ‘전쟁의 학생들’이란 공통점이 있다. 옛 시대와 새 시대의 충돌 속에서 그들이 소중하게 지켜왔던 가치관이 무너져 내린 것. 알그렌은 미군의 인디안 학살에 참여한 뒤 몸과 마음이 황폐해진다. 그가 추구했던 용기와 희생, 명예 같은 군인정신은 더 이상 존재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살아갈 지향점을 잃은 알그렌에게 가쓰모토는 이 세상엔 목숨을 걸고서도 지켜야할 신념이 있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가을의 전설’을 만든 즈윅 감독은 이 영화에서 액션, 드라마, 사랑, 철학 등 다양한 주제들을 버무려냈다. 그래도 가장 큰 볼거리는 사무라이 군대와 천황 군대가 펼치는 두 차례 전투. 오랜만에 컴퓨터그래픽 등 특수효과에 기대지 않고, 사람의 몸으로 리얼하게 그려낸 전쟁영화의 전형을 감상할 수 있다. 영화 전반부, 안개가 자욱이 깔린 숲 속에서 펼쳐지는 첫 번째 전투는 사무라이의 칼이 어설픈 신식군의 총을 이기는 희한한 싸움. 괴물 같은 가면을 쓰고 일제히 모습을 드러낸 사무라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으로 신식군대를 압도한다. 후반부를 장식하는 최후의 결전은 더 장대한 규모로, 더 피비린내 나게, 더 비장하게 펼쳐진다.
벚꽃이 눈송이처럼 흩날리는 신사(神社), 바다에 보석처럼 점점이 박힌 섬 등 수묵화 같은 풍광과 일본 전통악기를 활용한 한스 짐머의 영화음악 등 곳곳에서 일본적 색채가 물씬 묻어난다. 여기에 ‘폭력과 죽음’을 찬양하는 사무라이에 대한 미화는 한국 관객들에게 거부감을 줄 수도 있겠다. 9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 가.
고미석기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