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검사 중에도 열사로 불리는 분이 있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밀사로 파견됐다 분사한 이준(李儁) 열사다. 한국 최초의 근대적 사법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1895년 설립) 제1회 졸업생인 그는 임관되자마자 조신(朝臣)들의 불법과 비행을 파헤치다 한 달 만에 면직된 강직한 검사였다.
망명 투옥 유배 등 간난신고를 겪다 10년 만에 복직한 그가 또다시 법부대신에게 밉보여 구속되자 대대적인 ‘이준 검사 옹호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부패한 사법은 문명의 수적(讐敵·원수)’이라는 당시 오세창(吳世昌) 선생의 연설제목이 1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도 썩 어색하지 않다.
▼무너진 기대, 법치의 위기 ▼
법조계에도 이 같은 지사적 전통이 있다. 법조계는 또 다른 어느 분야보다도 많은 인재를 배출해 왔다. 그런데도 건국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법조인 대통령이 나오지 않은 것은 우리 사회의 정치적 미숙과 무관치 않다. 따라서 노무현 이회창 후보가 경쟁한 2002년 대선은 첫 법조인 대통령 탄생 이상의 것을 기대케 했다.
이제는 우리도 전근대적인 인치(人治)의 때를 완전히 벗어버리고 제대로 된 법치를 해볼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기대는 곧 무너졌다. 오히려 지난 1년간 우리 사회 도처에서 법치가 위기를 맞았다. 청와대와 국회에서 그리고 거리에서 법치는 중대한 도전에 직면했다.
불리한 수사결과가 나오면 청와대조차 검찰을 비난하는 터에 야당이 검찰을 신뢰할 리 없었다. 비리의원들에 대한 체포동의안 부결은 아예 여야가 암묵적으로 공모해 검찰의 법 집행을 조롱한 셈이었다. 그러니 거리에서도 법은 쉽게 무너져 내렸다. 작년 말, 노 대통령이 폭력시위를 막다가 부상한 경찰관들을 찾아가 “자네들은 대통령이 원망스럽겠네”라고 한 말은 단순히 위로로만 들리지 않는다.
걸핏하면 특검 논란이 이는 게 법치 파행의 단적인 징후다. 불행히도 노 대통령은 집권 1년차에 이어 2년차까지 특검 논란 속에 맞고 있다. 작년만 해도 다수 국민이 과거 정권의 전비(前非)만 정리되면 새 정권의 가뿐한 새 출발이 가능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현 정권의 비리의혹이 잇따라 불거지면서 그런 희망조차 사라졌다.
새해가 밝자마자 노 대통령의 측근비리를 수사할 김진흥 특검팀이 활동을 개시했지만 특검정국의 끝이 보이지 않아 더 걱정이다. 검찰의 수사결과에 따라서는 당장 대선자금 특검이 도입될 여지가 있다. 무엇보다 각 정파가 벌써부터 사생결단하듯 덤벼들고 있는 4월 총선 이후가 문제다. 자칫하면 올해도 특검으로 지고 새는 한 해가 될 공산이 크다.
이런 나라가 어디 있고 이런 정권이 어디 있을까 싶지만 마땅히 출구가 없다. 노 대통령이 취임 직후인 작년 3월 초 ‘평검사와의 대화’에서 한 얘기가 예언처럼 다가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당시 한 검사가 후보시절의 민원전화 문제를 거론하자 “이쯤 되면 막가자는 것이죠”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내년엔 또 무슨 특검을 할까 ▼
하루하루 지켜보면 몹시 어지러워도 1년쯤 뚝 떼놓고 보면 참으로 허망한 게 우리 정치다. 시종 요란하긴 한데, 따져보면 돌고 돌아 제자리에서 몇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곤 한다. 노 대통령의 지난 1년이 딱 그랬다. 노 대통령의 오기가 되레 측근비리를 키운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다.
검찰이 발표한 측근비리만 봐도 노 대통령 말대로 그 자신이나 특검이나 이젠 각자 정말 막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그것이 노 대통령이 강조한 것처럼 ‘고통의 언덕을 넘어 새로운 미래로 향하는’ 정치개혁의 논리적 귀결이다. 누구든 가다 멈추거나 돌아가려 해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파국을 부를 뿐이다. 김진흥 특검팀은 이준 열사의 각오로 수사에 임했으면 한다.
임채청 편집국 부국장 ccl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