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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1904 vs 2004]세력균형과 세력재편

입력 | 2004-01-06 18:48:00

100년 전인 1904년 2월 8일 발발한 러일전쟁은 한반도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우리의 전쟁이 아니었지만 결과는 그랬다. 100년 후인 2004년 북한 핵문제를 놓고 다시 둘러앉은 당시의 4강들. 상황은 다르다. 하지만 결과는 어떨까? -최남진기자


《2004년 1월 1일. 100년 전 뤼순(旅順)항의 러시아 함대 기습공격과 동시에 제물포에 상륙한 일본군 21사단의 자취를 더듬기 위해 인천항을 찾았지만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항구를 헤매다 화도진(花島鎭) 공원을 찾았다. 그곳 전시관 한쪽에 빛바랜 대형 사진 한 장이 걸려 있었다. 러일전쟁 발발 나흘 후인 2월 12일 주한 러시아 특명전권공사가 일본군의 호송 아래 경인특별열차 편으로 제물포에 도착, 본국으로 쫓겨 가는 장면이었다. 잠시 시간이 멈추는 듯 했다.》

# 균세(均勢·세력균형)와 재편(Transfor-mation)

1904년과 2004년의 한반도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아마도 이 두 단어일 것이다. 흔히 ‘열강(列强)의 시대’로 기억되는 100년 전의 국제정세를 설명하는 단어가 ‘균세’라면, 9·11테러 이후 미국이 힘으로 탈냉전 이후의 새로운 세계질서인 팍스 아메리카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재편’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표방하는 ‘부시 독트린’의 핵심전략은 선제공격 원칙과 일방주의, 그리고 전 세계 미군 재배치를 포괄하는 ‘Transformation(재편, 재조정, 변형)’이다.

100년 전 대한제국이 한반도를 엄습해오던 균세의 역학구조를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다.

그보다 20여년 전인 1880년. 제2차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한 김홍집(金弘集)에게 일본주재 청국 외교관이었던 하여장(何如璋)과 황준헌(黃遵憲)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근일 서양각국에서는 균세라는 법칙이 있어서 만약 한 나라가 강국과 인접해 후환이 두려우면 다른 나라들과 연합해 견제책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당시 조야(朝野)에 일대 파문을 일으켰던 황준헌의 ‘조선책략’은 바로 균세의 법칙에 편입돼가는 동아시아 질서에서 대한제국이 살아남는 방략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대한제국은 당시 국제질서였던 균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결국 국권상실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고 서울대 하영선(河英善) 교수는 말했다. 하 교수는 이어 “지금 한반도의 운명을 가름하는 것은 부시 행정부의 변형안보전략(global transformation)인데 과연 정책당국자들이 이걸 제대로 읽고 있는지 의문”이라고 반문했다.

북핵 문제도, 주한미군 감축 및 재배치도, 한미관계 재조정도 모두 ‘트랜스포메이션’이라는 이름으로 부시 행정부가 추구하는 21세기 신(新) 안보질서에서 파생돼 나온 각론이라는 것이다.

# 중국의 부상은 2004년판 신 세력균형?

“100년 전과 비교하면 당시 역사 무대에서 떨어져 나갔던 중국이 다시 부상하고 있다는 게 신 대륙세력 대 해양세력의 세력균형에서 주목할 점이다.”(김일영·金一榮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대륙세력은 청일전쟁 직후 ‘3국 간섭’으로 일본을 압박했던 러시아 독일 프랑스, 해양세력은 러일전쟁에서 공동보조를 취한 일본 영국 미국이다.

중국은 지난 한 세기를 제외하고는 수천년간 동아시아를 지배한 경험을 갖고 있다. 한반도와는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다. 중국이 다시 한번 소용돌이치면 한국 일본도 그 자장(磁場)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라는 얘기다.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 과정에서 후진타오(胡錦濤) 체제의 4세대 지도부가 보여주고 있는 ‘적극적 중재자’의 역할을 상기해 보면 중국의 자장은 이미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로버트 아인혼 미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선임연구원은 “이제 한국인들은 미국보다 중국을 더 가깝게 느끼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100년 전 일본의 부상이 대륙세력 대 해양세력 충돌의 계기가 됐듯이 ‘중화(中華)의 부활’은 한반도를 다시 국제정치의 격동 속으로 몰아갈 수 있다.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실질적이고 잠재적인 영향력을 생각하면 특히 미중관계가 악화될 경우 미국과 동맹관계인 한국은 전략적인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정재호·鄭在浩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미국과 중국이 지금은 반(反)테러전과 북핵 문제로 파트너십을 유지하고 있지만 서로가 내심 ‘잠재적 위협’(중국) ‘가상의 적’(미국)으로 바라보고 있는 한 언젠가는 갈등관계로 돌아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상진(申相振·광운대 중국외교) 교수는 “세계뿐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어도 20년은 지속될 수 있는 만큼 한국외교는 한미동맹을 기본 틀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 러일전쟁과 6자회담

“러일전쟁은 한반도에서 팽팽한 긴장으로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던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한판 대결이었다.”(허동현·許東賢 경희대 한국사 교수) 당시 한반도는 20세기 제국주의의 양대 축인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교차점에 서있던 ‘변경(邊境)’이었다. 한반도가 설 땅은 없었다.

2004년. 북핵 6자회담장에 둘러앉은 남북한과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100년 전에도 등장한 배역들이지만 약간은 다르다.

우선 한반도의 위치가 다르다. 한국은 동북아 중심국가를 꿈꾸고 있다. 북한은 핵을 무기로 미국 일본 한국을 윽박지르고 있다.

주변정세도 힘과 힘이 맞부딪치는 열강의 구조가 아니다.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은 포린어페어스 1, 2월호에서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즉 냉전 이후의 미국과 중국, 그리고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새로운 21세기 질서를 이끌어가는 협력관계”라고 규정했다. 특히 “미국과 중국, 그 어느 쪽도 또 다른 한국전쟁 발발에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며 북핵 문제에 관한 한 양국은 동반자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정옥임(鄭玉任) 전 세종연구소 연구원은 “그렇다고 한반도가 중심인 것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극(極)초강대국(Hyper Superpower)으로 불리는 미국의 전략에 따라 한반도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점에서는 100년 전 러일전쟁 당시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말했다.

김창혁기자 chang@donga.com

▼내년까지 대대적 이벤트 ▼

1904년 2월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군 장교들이 축배를 들고 있다. 2004년 일본은 러일전쟁의 현대적 의미를 찾는 작업을 시작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일본의 승리는 당시 청조(淸朝) 타도를 목표로 삼았던 쑨원(孫文) 등 중국의 혁명세력을 각성시키는 계기가 됐을 뿐 아니라 인도와 동남아시아 각국의 민족의식을 고양시켰다.”

산케이신문은 3일자에서 러일전쟁의 의의를 이렇게 규정했다.

일본은 러일전쟁이 시작된 1904년보다는 일본의 승리가 결정된 1905년을 더 중시한다. 러일전쟁 100주년 기념행사도 2005년에 집중돼 있다.

우익 성향의 일본 역사학자들은 러일전쟁에 대해 “‘동양의 소국’이었던 일본이 남하정책을 펴던 ‘대국’ 제정 러시아를 물리침으로써 세계사의 물길을 돌린 쾌거”라고 평가한다.

학술단체들이 순수한 의도에서 개최하는 심포지엄도 있지만 상당수는 역사교과서 왜곡을 주도한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등 우익단체들이 마련한 행사다. 보수우익 논조의 신문과 잡지들도 러일전쟁 특집기사를 게재하면서 분위기를 띄우려 애쓰고 있다.

러일전쟁 승리를 ‘위대한 일본의 부활’로 몰고 가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요미우리신문은 ‘일본의 결단-국가전략’을 주제로 한 러일전쟁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을 다음달 2일 도쿄에서 개최한다. “메이지(明治) 개혁의 총결산인 러일전쟁이 그 후 일본의 운명과 세계 동향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어떤 교훈을 남겼는지 논하려는 취지”라고 설명한다.

야마나시가쿠인(山梨學院)대와 러시아 해군중앙박물관 등은 ‘포츠담 강화조약 100주년’을 주제로 올 3월 러시아, 내년 5월 일본을 오가며 심포지엄을 공동 개최한다. 일부 학자들은 “당시 일본이 처한 정치적 군사적 상황은 자위대 이라크 파병을 앞둔 지금과 여러모로 닮았다”며 “러일전쟁의 ‘현대적 의미’를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도쿄=박원재특파원 parkwj@donga.com